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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문화강좌

생명문화강좌는 회원들이 함께 대화하고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장을 마련합니다. 지구와사람의 전신인 생명문화포럼 때부터 ‘생명문화의 지향과 과제’, ‘음악과 영성’, ‘미술과 생명’, ‘생명과학의 발전과 우리의 미래’, ‘건축이 전하는 공간의 생명성’ 등 미술, 음악, 건축, 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강의를 진행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친교와 함께, 지구와 사람을 잇는 다양한 주제의 프로그램들로 진행합니다.

지난 강좌 소개
2016 제 3차 생명문화강좌 브런치 토크 '군대 없는 나라, 코스타리카의 행복 - 장은교 기자의 4박 6일 여행기' (9월 10일)
  • 2016-09-19
  • 2596


2016년 9월 10일 오전 11시에 정동 산다미아노 카페에서 제 3차 생명문화강좌 브런치 토크가 열렸다. 이번 강좌는 '행복'이라는 주제로 4박 6일간 코스타리카를 여행한 장은교 기자의 여행기를 함께 듣고, 행복한 나라란 과연 무엇인가에 관한 의견들을 공유했다. 장은교 기자는 한국외대를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2005년 경향신문에 입사해 문화부, 사회부, 정치부, 국제부, 정책사회부를 거치며 다양한 분야의 혜안을 쌓아왔다. 2009년에는 〈한국인 절반 이렇게 산다 - 비정규직 800만 시대〉를 기획 보도해 한국기자상을 수상한 바 있다. 아래 전문은 행복을 찾아 코스타리카로 떠난 장은교 기자의 여행기를 생생히 담은 글이다.


[프롤로그]푸라비다, 코스타리카


왜 이런 질문을 하지.

카를로스(47)는 웃고 있었지만 난감해보였다. 2015년 12월 4일 오전 9시 30분. 코스타리카 수도 산호세의 어린이 박물관 앞. 그는 한국에서 ‘행복’을 찾아왔다는 기자를 만났다.

딸 케렌(10), 여자친구 베레니스(45)와 함께 박물관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공원 벤치에 앉아있던 카를로스는 “코스타리카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고 평화로운 나라라고 해서 왔다”는 말에 두 팔을 벌리며 “뿌라 비다!(Pura Vida!)”라고 말했다. 스페인어였지만 지금은 코스타리카 사람들만 쓰는 말. “인생은 아름다워” “인생 참 좋다” “다 잘 될거야”라는 뜻이다. 카를로스는 “행복을 찾아 온 거라면 정말 잘 왔다”라며 활짝 웃었다. 여자친구와 딸도 방실방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로스의 표정이 조금씩 답답해지기 시작한 건 두 번째, 세 번째 질문이 계속되면서였다. “코스타리카는 군대가 없는 나라인데 불안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깔로스는 또 웃으며 “전혀 두렵지 않고, 군대는 필요없다”고 답했다. 나는 물었다. “남미는 내전과 분쟁이 끊이지 않고 지금은 전 세계가 테러때문에 시끄러운데 그래도 불안하지 않은 건가” 카를로스는 웃기만 했다. 다시 물었다. “다른 나라가 코스타리카를 침입하면 어떻게 하지” 카를로스는 천천히 되물었다. “코스카리카는 이웃끼리도 싸우지 않는 나라야. 왜 우리가 이웃나라랑 싸우지...이웃나라가 우리나라를 침입할까봐 왜 두려워해야하지” 조금 당황했지만 다시 물었다. “세상엔 힘이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가 있잖아. 군대가 없으면 약하게 보고 공격할 수도 있고,,,”

카를로스는 말했다. “나는 태어나서 한번도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어. 평범한 시민들이 어느날 갑자기 군대에 끌려가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사람을 억지로 군대로 끌고 가는 법이 없는 나라...이런 나라가 맞는 거 아닐까. 나라끼리 문제가 생기면 대화로 잘 풀면 돼. 우리나라는 70년 전에 군대를 없애고 그 돈을 교육에 투자했어.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좋은 교육을 받고 마음 편하게 살고 있지. 이게 맞는 거라고 생각해”

베레니스도 거들었다. “난 전에 미국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어. 재밌긴 하지만 여행하기 좋은 나라지 살기 좋은 나라는 아닌 것 같던데...사람들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어” 말문이 막혔다. 나는 지금 이상한 나라에 불시착했다.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카를로스는 전자제품 대리점에서, 베레니스는 정육점에서 일한다고 했다.

끔찍한 내전과 피바람이 그치지 않았던 중미의 한 가운데서 1948년 군대를 없앤 나라. 다른 나라 군대의 보호를 받거나 말로만 중립국이 아니라 군인이 단 한 명도 살지 않는 나라, 유럽연구소가 만든 지구행복지수(Happy Index)에서 2014년과 2015년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꼽힌 나라, 국토의 25%가 국립공원인 나라, 평화와 인권이 국가브랜드가 된 나라 코스타리카를 다녀왔다. 
 
코스타리카에 있는 내내 나는 당연한 것을 이상하게 자꾸 묻는 사람이었고 점점 궁금해졌다. 나는 우리는 행복에 대해서 어떤 질문을 던지는 사람인가.
 

[1]군대를 없앤 나라


코스타리카에 가기 전엔 코스타리카를 몰랐다. 한국에 산다고 한국을 다 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 나라는 공부할수록 낯설었다. 

북쪽으로는 니카라과, 남쪽으로는 파나마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코스타리카에선 1948년 쿠데타가 일어났다. 대선에서 패배한 대통령이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국회를 움직여 정권을 연장하자 카르타고라는 지역의 농장주 호세 피게레스가 민병대를 일으켰다. 내전이었다. 불과 6주동안 약 4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피게레스는 이상한 선언을 했다. “다시는 이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군대를 없애겠다”는 것이었다.

그해 12월 1일 피게레스는 망치를 들고 군사령부 건물 벽을 직접 부쉈다. 정말 군대는 사라졌고 국방비는 교육과 보건비에 쓰였다. 이 약속은 67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단 한 번의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피게레스 이후의 어떤 대통령도 군대를 만들지 않았다. 동화같았다.

1948년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해다. 피게레스가 망치를 들었던 12월 1일 한국에선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졌다. 북미와 남미에 끼인 작은 나라, 전쟁에 지쳐있던 코스타리카처럼 그때 그시절 우리도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떠났다. 군대없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정말 평화로울까. 2015년 12월 4일 코스타리카에 도착했다.
 

■군대는 몰라도 평화는 아는 사람들

코스타라카에선 군인을 본 사람을 찾는 게 가장 어려웠다. 이미 67년동안 군대가 없었기때문에 군인은 영화나 외국방송 뉴스에나 있는 존재였다. 비비안도(36)도 그랬다. 광고회사에서 회계책임자로 일하고 있는 비비안은 “태어나서 한번도 군인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비비안은 나와 생일이 사흘밖에 차이나지 않는 동갑내기다. 같은 해 태어난 우리는 맏딸이고 경영학을 전공한 것 등 공통점이 많아 금세 친해졌지만, ‘군대있는 나라’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비비안이 사는 세계는 참 달랐다.

비비안은 유치원때부터 도덕교육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했다. 보통 하나의 주제로 1년씩 토론을 했는데 예를 들면 어렸을 때는 친구와 사이좋게 잘 지내는 법을 배우고 좀 더 크면 이것을 심화시켜서 좋은 팀워크를 만드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따로 안보 교육은 받은 기억이 없다고 했다. 반공포스터를 그리고 반공영화를 보며 반공글짓기를 했던 나의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지도를 그리고 북한은 주로 악마나 죄수로 표현했다. 이승복 어린이의 절규에 눈물도 흘렸다. 정기적으로 군인아저씨께 위문편지도 썼다. 몇년에 한번씩 전쟁위기설이 돌았고 우리가족은 정부가 주도한 평화의 댐 건설에 성금도 냈다. 그땐 몰랐지만, 그때부터 이미 누군가 우리를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배웠다는 것을 비비안과 얘기하며 깨달았다.

비비안과 1987년 이야기를 했다. 둘 다 기억이 흐릿한 어린 시절이지만 비비안은 오스카 아리아스 당시 대통령이 남미의 분쟁을 종식시킨 평화선언을 이끌어낸 공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해라고 기억했다. 정말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한국의 87년도 대통령 직선제가 발표된 역사적인 해다. 나는 그때 한국의 대통령은 군인 출신이었다고 말해줬다. 비비안은 군인이 대통령을 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나는 나중에 군인이 아닌 사람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말했다.

군대를 없애기로 했다고 그 약속이 67년이나 지켜지는 건 놀랍다. 정부의 힘만이라고 볼 순 없다. 비결이 뭘까 물었다. 비비안은 “가족인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 할머니가 젊었을 때, 그러니까 아직 군대가 있었을 때는 다들 남편을 숨겨야 했대. 남편이 군대에 전쟁에 끌려갈까봐 침대에 숨기고 지붕에 숨겼대. 그리고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일인지 할아버지를 통해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를 통해서 들어왔거든”

전쟁에 얽힌 나쁜 기억이라면, 한국도 부족하지 않다. 한국전쟁이 남긴 상처는 지금도 얼마나 많은 가정을 할퀴고 있는가. 전쟁과 학살 그리고 이산가족.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짐할 만한 이유라면 한국이 넘치고도 넘친다. 코스타리카의 노인들은 젊어서 남편을 군대에 뺏겼지만 지금 한국의 부모들은 젊은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노심초사한다. “그래도 군대가 없는게 불안하지 않아?” 비비안이 답했다. “글쎄...군대가 있었다면 보다 잘 훈련된 문화때문에 사람들이 부지런해졌을진 모르겠어. 코스타리카도 강대국이 됐을지 모르지. 그래도 나는 누군가가 목숨을 걸고 나를 지켜줘야만 하는 나라에 살고 싶지 않아. 누군가 우리를 공격할 것이라는 상상이 잘 안돼. 나는 군대가 없어도 되는 이 나라가 자랑스러워.” 부러웠다. 그래도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카를로스 가족이 군대없는 나라가 정상이라고 말한 뒤 잠시 하늘을 보며 생각을 가다듬고 있을 때 루이스(38)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코스타리카에 온 걸 환영해. 혹시 도와줄 일이 있을까” 보험회사의 운전기사로 일한다는 루이스는 아내와 처제, 아이들과 함께 나들이를 나왔다고 했다. 루이스가 가족과 함께 온 곳은 교도소로 쓰였던 곳을 개조해 1993년부터 국립미술관, 94년부터 어린이 박물관으로 만든 곳이다. 어린이 박물관 앞에 어울리지 않게 박힌 대포 위를 아이들이 목마 타듯 올라 놀고 있었다. 전쟁이 있었을 때 실제 쓰였던 대포라고 했다.

루이스에게 군대 얘기를 물었다. 가장으로서 군대없는 나라의 안보가 조금은 걱정된다는 답이 나올 것도 같았다. 루이스는 몇마디를 나누더니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차근차근 말했다. “잘 생각해봐. 이웃이랑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지? 먼저 대화를 하잖아. 이야기를 해서 서로 오해를 풀고 어려운 점을 이야기하면 되잖아. 다른 나라와도 전쟁을 할 수 없도록 대화를 많이 하면 돼. 신의 축복이 함께 할거야. 기억해. 대화를 하면 싸움이 없다는 걸” 마치 ‘싸움주의자’라도 된 것처럼 계속 질문하는 내가 안쓰러운 표정이었다. 루이스는 “월급은 적지만 돈을 벌 수 있고 가족과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이 나라가 좋다”며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평안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또 부러웠다.

거리로 나갔다. 국립박물관 앞 광장으로 갔다. 거기서 제일 어려보이는 커플을 붙잡았다. 선입견을 덧붙여 이야기하면 ‘날티’나는 커플이었다. 군대니 평화니 행복이니 하는 주제를 묻기엔 부적절해보이는 인상을 가진 이 커플에게 나는 또 한방을 맞았다. 고졸이라는 미첼(18)은 인터뷰 내내 남자친구의 볼뽀뽀를 받으며 또박또박 답했다. “군대가 있다고 전쟁을 막을 수 있어? 전쟁이 터지면 어차피 모든 피해는 시민들이 안고 가잖아” 맞는 말이다. 군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것이지만 역사적으로 많은 군대가 외국군대가 아닌 자국민을 적으로 만들고 위협했다. 그래도 코스타리카가 좀 더 강대국이 됐으면 하는 바람은 없냐고 물었다. 미첼은 남자친구에게 입을 맞춘 뒤 답했다. “강대국이면 좋은 거야? 작은 나라라서 더 잘 뭉칠 수 있는 거 아닌가?” 미첼의 남자친구 악셀은 두 살 연하의 중학생이었다. 한학년을 유급해 다시 다녀야한다고 했다. 악셀은 말했다. “혹시 전쟁이 나면 누가 싸울까 싶긴 한데...코스타리카인들은 겸손하고 배려를 잘해. 힘이 센 것보단 그런 게 더 자랑스러운 거 아냐?” 이 지혜로운 커플의 데이트를 더 방해하면 안되겠다 싶었다.

제일 까칠해보이는 인상의 두 남성을 찾았다. “코스타리카가 행복한 나라라고 해서 왔다”고 하니 입을 삐쭉거렸다. 옳거니 싶었다. 사흘동안 50명이 넘는 시민들을 만난 끝에 처음으로 나온 냉소적인 반응이었다. 이제야 좀 균형잡힌 기사를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우리시오(21)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나라라는 슬로건을 이용해서 정부가 다른 문제를 다 덮으려고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럼 그렇지. 나는 좀 더 구체적으로 문제를 말해달라고 했다. 마우리시오는 말했다. “군대를 없애고 그 돈을 교육에 쓰기로 했는데 지금 현실을 봐. 축구선수가 교사보다 돈을 더 많이 받아. 교사는 후대를 양성하는 아주 중요한 직업이고 사회에 공헌하는 점이 훨씬 많은데 왜 대접을 이렇게밖에 안해주는지 모르겠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교사가 돈을 더 많이 버는 사회가 되어야 해” 나는 혹시 사범대생이냐고 물었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했다. 옆에 있던 안드레이(21)도 말했다. “군대가 없으니까 평화로운 이미지는 자동적으로 만들어지는 거잖아. 좋은 이미지를 더 잘 써야지. 지금 예산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어” 이들에게도 군대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나흘을 돌아다닌 끝에 군대와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을 가진 시민을 만날 수 있었다. 코스타리카에 마지막으로 군대가 남아있던 1948년에 다섯살이었다는 리디엣 할머니(72)였다. 리디엣은 “그때 과나카스테라는 북쪽 지역에 살았는데 밤에 폭탄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나. 내전으로 쫓겨난 대통령이 니카라과로 도망가는 길에 폭탄을 터뜨렸지. 어머니가 나를 꼭 껴안고 부들부들 떨었어. 전쟁은 나에게 슬프고 무서운 기억이야. 군대가 전쟁을 막아줄까? 난 오히려 전쟁이 날 확률을 높여준다고 생각해. 군대가 있는 것은 우리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외부에 알리는 거잖아.” 휴전상태의 분단국에서 군대를 없앤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일이지만 부럽고 탐났다. 이들의 확신과 지혜와 평안이.


■피게레스의 시민농장에서 만난 뜻밖에 여인

군대를 없앤 지도자, 코스타리카의 국부로 존경받는 호세 피게레스 전 대통령의 시민농장을 방문하기로 했다. 좋게 말하면 시민혁명, 나쁘게 말하면 쿠데타를 준비하고 일으킨 근간이 된 곳이라고 했다. 수도 산호세에서 남동쪽방향으로 차를 타고 2시간여를 달려 카르타고에 진입했다. 그런데 어디가 시민농장인지 찾기가 어려웠다. 국부로 추앙받는다는데 표지판 하나 없었다. 달리다 차를 멈추고 인근 시민들에게 물어보면 “이 마을이 피게레스의 가족이 대대로 살던 곳이다. 피게레스 가족들이 농장과 공장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먹여 살린 곳이다”라는 말만 할뿐 정확한 시민농장의 위치를 알진 못했다.

30여 분을 고불고불 길을 따라 헤매고 있는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잠시 동네 슈퍼에 차를 세웠다. 운전기사 아저씨가 다시 길을 물으러 간 동안 갑자기 차문이 열리며 한 할머니가 “헬로우!”라는 영어 인사를 하며 차에 올랐다. 놀랐지만 반갑게 인사했다. 비가 와서 운전기사 아저씨가 할머니를 태워주기로 했나보다 싶었다. 코스타리카에서 그 정도 친절은 이제 나도 익숙해졌다.

할머니는 갑자기 내 눈을 보며 빙그레 웃더니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악수를 청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내 남편은 대통령을 했던 피게레스에요. 이 나라에서 군대를 없앴죠. 내 아들도 대통령을 했어요. 내 딸은 지금 (프랑스) 파리에서 지구를 위해 일하고 있답니다. 오늘 오전에 남편에 대한 세미나를 열었는데 오늘 당신이 오는 줄 알았더라면 초청했을텐데 미안해요”

얼떨떨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이 할머니가 피게레스 전 대통령의 부인 카렌이라니. 운전기사 아저씨가 슈퍼에 길을 물으러 갔다가 한국에서 온 기자가 시민농장을 방문하러 왔다고 하니, 슈퍼에서 잠시 비를 피하고 있던 카렌이 반가운 마음으로 차안까지 온 것이었다. 행복의 나라엔 행운도 가득한 것인가.

기쁜 마음으로 악수를 하며 카렌에게 남편 자랑을 좀 해달라고 말했다. 카렌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코스타리카에서 군대를 폐지한 거죠. 코스타리카는 군대 대신 교육을 선택한 유일한 나라에요. 이라크, 시리아를 봐요. 군대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고 다치게 하나요”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는데 군대를 없애기까지 고민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카렌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우린 그때 그일이 옳다는 확신이 있었거든요. 전쟁 말고 교육을 택한 건 옳은 일이었고 가장 중요한 일이었고 가장 좋은 선택이었어요.”

한국 국민들에게 편지를 한 장 써달라고 부탁했다. 카렌은 기꺼이 펜을 들어 영어로 편지를 썼다. “한국도 군대를 없애고 그 비용을 교육과 평화와 당신들이 사랑하는 일에 쓰길 바랍니다” 카렌은 요즘 한국에선 보기 힘든 ‘그레이스’ 봉고차 앞자리에 앉아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한 뒤 떠났다.

동네슈퍼 주인은 “피게레스 가족이 어려운 사정을 감안해 25년동안 세를 받지 않고 영업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고 했다. 그 동네에는 이런 식으로 피게레스 가족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물어물어 피게레스 전 대통령이 살았던 곳을 찾아갔다. 집앞을 지키고 있는 경비원 제라도(37)는 “7년 정도 일했는데 이 근처에선 피게레스 가족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그는 “집을 다 제공받아서 살고 있는데 일을 그만두더라도 집에서 내쫓지 않는다”며 “어떤 집 딸들이 산호세에 있는 대학을 가게 됐는데 카렌이 집을 공짜로 내줬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부자이며 최고의 권력까지 가졌던 피게레스의 가족들은 돈과 힘을 이렇게 쓰고 있었다. 피게레스가 살았던 곳이 모두 '시민농장'이었다.

카렌이 “파리에서 지구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소개한 피게레스의 딸 크리스티나 피게레스는 유엔환경계획 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크리스티나는 지난해 12월 파리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협약회의에서 196개국이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한 기후변화협약에 서명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크리스티나는 영국 언론 가디언이 뽑은 2015년을 빛낸 인물 중 한명으로 선정됐다. 코스타리카 쿠데타 지도자의 딸은 지구의 미래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양한 역사교과서를 하나의 교과서로 통합시키기 위해 애쓴 한국 쿠데타 지도자의 딸이 생각났다.

카렌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는 반드시 행복해야 해요”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나는 간절히 행복해지고 싶어졌다.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 나왔던 ‘목소리’들이 떠올랐다. “우리는 전쟁이 없는 세상을 알지 못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전쟁을 하거나 전쟁을 준비했다. 다들 어떻게 전쟁을 치러냈는지 얘기했다. 우리는 한 번도 다른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고 어쩌면 다르게 사는 법을 몰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학교는 우리에게 죽음을 사랑하도록 가르쳤다. 나는 위대한 사상에 필요한 건 작은 사람이지, 결코 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전쟁의 역사를 승리의 역사로 몰래 바꿔치기해버렸다. 우리가 아직 살아있는 동안 우리한테 물어봐.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 멋대로 역사를 바꾸지 말고. 지금 물어봐.”


[2]담장없는 교도소, 어린이도 투표하는 나라

한국이 1등을 했다. 미국 의회조사국은 지난해 보고서에서 “2014년 한국이 무기 수입에 78억달러를 써서 1위에 올랐다”고 밝혔다. 2위는 이라크였다. 한국은 전쟁과 테러를 겪고 있는 이라크보다도 많은 돈을 무기 수입에 썼다. 여전히 많은 나라들이 더 강한 무기를 갖고 더 강한 군대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다른 나라들이 ‘힘으로’ 싸우려고 노력할 때 코스타키라는 ‘평화와 인권’을 브랜드로 만들었다. 코스타리카 말고도 35개국에 군대가 없지만 그중에서도 코스타리카가 특별한 이유는 평화를 끊임없이 전파하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코스타리카는 1987년 중미5개국 평화협정(에스키플라스 협정)을 이끌어 내 중미의 무력분쟁이 확산되는 것을 막았고, 1990년에는 이웃국가 파나마를 설득해 군대폐지를 선언하도록 했다. 2013년에는 세계의 평화운동가들과 함께 지뢰처럼 잔혹한 살상을 할 수 있는 무기거래를 금지하는 ‘무기거래금지조약(Arms Trade Treaty·ATT)안’을 만들어 유엔에서 통과시켰다. 코스타리카는 유엔 기구인 유엔평화대학을 유치하는 것도 성공했다. 권태면 전 코스타리카 대사는 “코스타리카는 남한 영토의 절반밖에 안되는 중미의 작은 나라지만, 유엔에서 평화와 인권을 논의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고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나라”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기, 코스타리카만의 놀라운 실험이 있다.


■미래의 유권자가 지켜보고 있다-어린이·청소년 투표

코스타리카에선 어린이와 청소년도 투표를 한다. 어린이 투표는 5살부터 초등학생까지, 청소년 투표는 중고생들이 대상이다. 물론 이 투표는 ‘무효표’다. 선거 결과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어른들과 똑같이 생긴 투표소에서 선거관리위원회가 만든 투표용지에 어른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비밀·보통·평등·직접 선거를 한다. 굳이 이런 이벤트를 하는 이유는 정치와 선거를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즐기고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다.

어린이 투표는 산호세의 어린이박물관에서 할 수 있다. 투표소가 전국에서 딱 한 곳이기 때문에 지방에 사는 어린이들에겐 불리하다. 때문에 각 정당에서 무료버스를 제공한다. 아이들은 투표를 마친 아빠 엄마의 손을 잡고 투표소로 와서 한 표를 행사한다.

산호세에서 만난 여고생 다니엘라(18)의 가족(할머니, 엄마, 이모)은 “어린이 투표 결과를 지켜보는 게 너무너무 재밌다”고 말했다. 결과를 지켜보다니? 실제 선거에 영향도 못미치는 투표결과를 발표까지 한다는 것일까. 이모 실비아(47)가 손동작을 쓰며 자세히 알려줬다. 보통 선거방송이 새벽 5시부터 계속되는데 성인들의 투표진행상황과 함께 어린이들의 투표 모습도 보여준다고 했다. 최종 투표결과를 발표할 때는 방송에서 성인유권자들의 결과와 어린이 투표 결과를 동시에 한 화면에서 공개한다. 실비아는 말했다. “투표결과가 나오기 전 성인 투표와 어린이 투표가 빙글빙글 돌아가며 가슴을 졸이게 한 뒤 나오는데 얼마나 재밌는지 몰라!” 결과가 다르면 현재의 유권자는 A후보를 뽑았지만 미래의 유권자는 “당신(A후보)을 뽑지 않았다”는 ‘경고’도 될 수 있다. 실비아는 “어린이들도 재밌게 선거방송을 지켜볼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청소년 투표는 공식선거일보다 3~4개월 먼저 실시된다. 각 학교에 투표소가 설치되고 어른들과 같은 방법으로 선거를 하는데, 선거 결과는 학교별로만 발표한다. 대신 선거의 모든 과정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나와서 관리하고 결과도 각 정당에 보고된다. 전직 교사인 엄마 라우라(49)는 “청소년 선거결과에는 정당들이 굉장히 민감한 편”이라고 말했다. 청소년들은 당장 몇년 후면 실제 유권자가 되고,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은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선거 전에 가정에서 누구를 찍을 것인지 이야기를 많이 하기 때문에 여론의 향배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공식 선거 전에 하는 일종의 ‘중간점검’ 역할을 하는 셈이다.

2013년 대선 때 청소년 투표에 참여했다는 다니엘라는 선거 경험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니엘라는 “줄을 서서 기다리고 투표용지를 받고 누구를 찍을까 고민하는 모든 과정이 의미있었다”며 “우리 학교의 선거 결과는 실제 대선 결과와 달라서 친구들이 ‘어른들은 바보’라고 흉봤다”고 말했다.

코스타리카의 청소년들은 선거날 더 바쁘다. 투표소까지 가는 길 안내와 정당별 선거운동 지원, 투표용지 교부 등 실제 선거에 필요한 모든 활동을 청소년들이 한다. 라우라와 실비아는 부모님으로부터 선거가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고 자신들도 청소년 때 선거봉사활동에 참여했다고 했다. 라우라 자매는 “선거는 하나의 정체성을 갖는 과정이고 내가 투표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어렸을때부터 심어주고 즐거운 마음으로 후보들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선거이야기를 이렇게 신나는 목소리와 들뜬 표정으로 나누는 것이 왠지 어색했다.

출구조사 발표도 따로 하는지 물었다. 다니엘라 가족은 출구조사가 무엇인지 물었다. 투표를 하고 나온 사람들에게 비공개로 누구를 찍었는지 언론사에서 조사해서 개표 전 예상결과를 발표하는 것이라고 설명해줬다. 다니엘라 가족은 폭소를 터뜨리며 웃었다. “우린 그런거 안해도 다 아는데...” 어떻게? “투표하러 줄서있는 것만 봐도 알거든” 무슨 소릴까. “코스타리카에선 선거할 때 각자 지지하는 정당의 색깔 옷을 입고 가. 옷이 아니면 머리핀이라도 하고 가지. 깃발도 흔들고. 누가 누굴 찍으러 왔는지 한눈에 알 수 있어. 선거는 축제잖아. 투표소 앞에선 항상 정당에서 나와 홍보활동을 하면서 노래도 하고 음식도 제공해. 반대하는 후보가 나와도 사람들은 수고했다고 박수도 쳐주고 응원도 해줘”

맙소사. 촌스러운 질문인 것을 알면서도 안 할 수 없었다. “지지하지 않는 후보가 당선되면....정치 보복 같은 건 두렵지 않아?” 역시, 말도 안된다는 표정이 보였다. “맙소사. 보복? 누가? 왜?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떨어지더라도 선거는 그 자체로 축제야. 가족끼리도 아빠와 엄마, 아들과 딸이 다 다른 후보를 찍기도 해. 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다같이 축복해주지. 누굴 찍었는지 말할 의무는 없지만 누구나 거리낌없이 말해.”

이모가 개구진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려줬다. “내가 아는 두 친구가 있었는데 한 친구가 지지하는 후보가 떨어지고 다른 친구가 지지하는 후보는 당선됐어. 그래서 이긴 친구가 진 친구의 집 앞에 간에 좋은 음료를 두고 왔어. 술 좀 마셔야 할텐데 먹고 속 좀 달래라는 뜻이지. 정말 위트가 넘치지? 이게 코스타리카 식이야. 선거 결과는 있는그대로 받아들이는거야. 폭력적인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 혹시 지역이나 세대, 경제력에 따라서 투표결과가 달라지지 않는지... 또 나왔다. 이게 무슨 질문이지 하는 표정. 다니엘라 가족은 한 목소리로 답했다. “선거는 오직 개인의 선택. 즐거운 축제라니까!”


■가장 낮은 자의 인권, 담장없는 교도소

코코리교도소는 초등학교에서 불과 50m 거리에 있었다. 산호세 남동쪽 카르타고의 상점과 식당, 주택들이 있는 평범한 마을이었다. 이 곳에 ‘인권교도소’가 있다고 해서 찾아왔다. 평화와 인권을 중요시하는 코스타리카에서 가장 낮은 사람들의 인권은 어떤지 궁금했다.

코코리교도소는 외딴 곳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 ‘곁’에 있었다. 차로 누구나 교도소 앞까지 갈 수 있고 교도소 앞 넓은 공터에서 왔다갔다 해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것은 교도소의 모습이었다. 코코리 교도소엔 담장이 보이지 않았다. 벽이 없는 교도소라니. 교도소는 철조망으로만 둘러싸여 있었다. 하루 전 지나친 코스타리카 국립대학도 철조망이 둘러져있었다. 민가에서도 철조망은 흔히 쓴다. 코코리 교도소는 고작 철조망으로 죄인들을 가두고 있었다. 안에서도 밖이 훤히 보였다. 파란색 지붕과 빨간색 지붕, 마당엔 빨래가 널려있었다. 교도소 안을 걸어다니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옷이 다 달라서 교도관인지 재소자인지 알 수 없었다. 조금 겁이 났고 기분이 이상했다.

코코리 교도소에서 24년동안 선교활동을 했다는 마르빈 목사님(59)을 만날 수 있었다. 목사님은 “코코리 교도소는 코스타리카에서도 단 한 곳, 특별하게 실험적으로 운영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담장을 없애고 재소자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며 사회에 다시 나갈 기회를 주려고 최선을 다하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1990년대에는 카르타고 시내에 있었는데  재소자가 너무 많아지자 이전을 검토하면서 2000년 정부에서 ‘교도소의 롤모델’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새 건물을 지었다. 높은 담장이 없는데도 지난 15년동안 탈옥을 시도한 사람은 단 한 명이었고 실패했다고 했다.

교도관들을 설득해 교도소 안으로 들어갔다. 담장은 없으나 보안검색은 철저했다. 면회자 중에 가끔 마약을 숨겨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두개의 문과 보안검색대를 통과하고 나니 색색깔의 꽃밭이 일궈진 정원이 보였다. 모두 재소자들이 직접 씨를 뿌리고 가꾼 것이라고 했다. 정원 안쪽에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아기 그리스도와 성모상을 만들어놓은 장식물도 보였다. 상당히 공을 들인 유리공예 나무공예 작품이었다. 역시 교도소에서 배운 솜씨로 재소자들이 만든 것이다. 

오른쪽에는 방갈로 형태의 건물이 보였다. 재소자들이 연인 또는 부인과 ‘합방’할 수 있는 공간이다. 모든 재소자들은 15일에 한번씩 4시간동안 그곳에서 만남을 가질 수 있다. 방안에는 침대와 TV가 있고 전자레인지와 화장실도 갖춰져 있다. 주로 부인들이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와 같이 먹는다고 했다. 2011년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동성애자 재소자도 연인과 이곳에서 만남을 가질 수 있다. 인권교도소라 역시 다르다고 놀라워하니 안내해준 교도관이 “연인과의 합방은 모든 교도소에서 가능하다”고 했다. 죄인이라도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는 당연히 지켜줘야 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죄수복도 따로 없다.

마침 남편을 면회 온 아나(26)를 만날 수 있었다. 음식바구니를 이것저것 챙겨 온 아나는 “다른 교도소에 있다가 옮겼는데 남편이 훨씬 안정적으로 보인다”며 “면회를 갈때도 교도관들이 인간적으로 대해준다”고 말했다. 지난 번에 있던 교도소에서는 폭력을 당했는데 이곳에선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아나는 아이 셋을 낳고 살다가 2014년 교도소 안에서 남편과 결혼식을 올렸다. 일반가족면회는 1주일에 한 번이고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에는 아이들을 초정해 작은 파티도 열어준다. 이때 재소자들은 교도소에서 배운 기술로 만든 각종 공예품을 전시하고 가족들은 이 물품을 판 돈으로 생활비에 보태쓴다. 재소자 가정의 평화도 지켜줘야 한다는 뜻이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니 공을 차는 소리가 들렸다. 체육관이 있었다. 열심히 뛰는 사람들 중에 바르셀로나 네이마르 유니폼에 반바지를 입은 남성이 교도소장 리카르도(56),  나머지는 모두 재소자들이라고 했다. 교도소장이 재소자들과 축구를 하다니. 잠깐 인터뷰를 청했다.

머쓱한 표정을 짓던 교도소장은 자신이 18살때부터 교정공무원으로 일했고 코코리 교도소 초대 교도소장으로 14년 넘게 재직중이라고 했다. 죄인들을 너무 관대하게 대해주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교도소장은 “중범죄자를 엄하게 다스리는 교도소에도 있어봤지만, 이 곳의 재범율이 낮고 교화에도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교도소장은 “가장 중요한 것은 재소자들을 한 명의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들이 지금은 여기 있지만 다시 사회에 나갈텐데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믿게 하고 바뀌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우리는 그들이 교도소에 있는 동안 시간과 장소를 제공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담장이 없는 것은“ 당신들이 곧 나가서 살아가야 할 세상이 바로 저기에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래도 “지나치게 대우가 좋다는 비판은 당연하고 그런 사회의 시선까지도 바뀌어나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교도소의 역할”이라고 했다. 교도소장은 함께 축구도 하고 책도 보면서 재소자들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했다. 옆에 있던 마르빈 목사님도 말했다. “정말 뉘우치게 하느냐가 제일 중요하고 그게 교도소밖의 시민들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뉘우치게 하려면 먼저 죄인을 사람으로 대해줘야 한다”

코로리 교도소에는 초범자만 오지 않는다. A동에는 징역 12~20년을 선고받은 사람이 들어가는데 이곳은 사방이 완전히 막혀 있다. 교도소 전체는 철망으로만 둘러싸여있지만 수감동은 막혀있는 것이다. B동은 아직 재판결과가 확정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 곳엔 창문이 있다. C동은 완전 개방형 숙소인데 형기가 2~12년 이하로 남은 사람들이다. 일정 기간의 형기를 성실하게 잘 채운 사람들에 한해 C동으로 옮겨준다.

재소자들이 교육을 받는 곳으로 들어가봤다. 형기의 3분의 1을 채우면 가죽공예, 유리공예, 나무공예 등을 전문선생님에게 배울 수 있다. 교실마다 재소자들이 가득했다. 자미에라는 이름의 재소자가 투박한 손으로 나무인형에 색칠을 하다가 수줍게 웃었다. 교도소에 와서 밤비와 키티와 성모상을 그리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줄은 몰랐다. 한 재소자에게 “솔직히 여기서 지내는게 어떠냐”고 물었다. “조금 답답하지만 우리를 사람으로 대해주는 게 느껴지고 고맙다.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참을 둘러보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이 재소자들 손에 칼과 톱과 망치가 들려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들은 무기가 어울리던 사람에서 예술도구가 어울리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교도소를 나와 일부러 근처 식당으로 갔다. 밥을 먹고 있던 테네(46)라는 여성에게 물었다. 떼네는 15년 전 교도소가 들어오기 전부터 이 마을에서 딸을 키우며 살고 있다. 교도소가 코 앞에 있는데 불안하지 않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반대도 심했지. 근데 친척 중에 한 명이 교도소 옆에 있는 게 제일 안전하다고 해주더라고. 15년이 지난 지금은 찬성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이들도 겁내지 않아”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들인데 저렇게 잘해줘도 되냐고 물었다. “우리는 다 같은 사람이고 사람은 실수할 수 있잖아. 아무도 완벽하지 않아. 기회를 줘야지” 혹시 교도소가 들어오는 대가로 정부가 지역에 혜택을 준 게 있느냐고 물었다. “혜택? 글쎄...내가 과일가게를 하는데 면회오는 사람들이 가끔 과일을 사는 정도? 무슨 혜택?” 나는 또 내가 이상한 질문을 하는 사람이 돼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3]데니스네 집으로 가는 길

데니스(51)네 집으로 가는 길은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수도 산호세 중심의 산페드로 마을. 상점에서 빵과 먹을 거리를 사고 집으로 출발할 땐 걸어가도 30분 거리라고 했지만, 도착하고 보니 한 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가는 길마다 인사하고 태워주고 들러야 할 곳이 생겼다. 산호세 시내에서 데니스는 둘째 딸 알리슨(21)의 친구들을 만나 아이들이 가는 곳까지 태워줬다. 아이들은 “친구의 부모님이 친구같다”고 했다. 신호에 멈춰 서 있을 땐 옆차선 사람들과 인사했다. 도로가 정체된 틈을 타 한 소년이 도로사이로 줄과 공을 이용한 묘기를 선보였다. 실패했지만 박수를 받았다. 소년이 머리를 긁적이며 인도로 돌아갈 때까지 차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집 앞에 다와서 데니스는 이웃집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갔다. 1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막내아들 데니스(12)가 놀러 간 친구집이라고 했다. 데니스는 아들과 함께 나왔고 대문에서 아들의 친구, 아들 친구의 부모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서야 나왔다. 2015년 12월 6일 골목과 이웃, 가족이 있는 코스타리카 데니스 아저씨네 집에 놀러갔다. 


■코스타리카 가족이 사는 법

하얀색 담벼락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하늘색으로 칠한 작은 정원이 보였다. 전자제품 수리기사로 일한 데니스네 집은 중산층에 속한다. 코스타리카에도 빈부격차가 크지만 중산층이 두터운 편이다. 이 집은 아내와 열심히 돈을 모아 10년 전 장만한 것이라고 했다.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이사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돈을 많이 벌었다고 갑자기 평수를 늘려가지도 않는다. 대신 누구든 집을 제식대로 고쳐서 산다. 코스타리카에 있는 동안 똑같이 생긴 집을 보기 어려웠다. 낮은 담장의 단독주택들은 알록달록한 색깔로 칠해져있었고 작은 아파트도 층마다 집마다 벽색깔과 창문장식이 달랐다. 데니스네 집 입구에는 에펠탑과 모나리자 퍼즐 등이 전시돼 있었다. 퍼즐을 좋아하는 아내 파트리시아의 솜씨를 전시해둔것이었다. 옆 벽면에는 조개와 돌이 다닥다닥 붙여져 있었다. 가족끼리 여행을 갈때마다 모아서 장식한 것이라고 했다. 거실 벽에는 증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진이 있었고, 거실 한가운데는 온가족이 힘을 합쳐 만든 크리스마스 트리도 반짝였다. 아이들이 음료수캔을 이용해 만든 장식품도 보였다.

인테리어는 한국에서도 대유행이다. 특히 북유럽 스타일이 큰 인기다. 전형적인 20~30평대 아파트를 어떻게 북유럽 스타일로 개조했는지 보여주는 블로그가 수백개가 넘는다. 데니스네 집은 그런 인테리어 기준으로 본다면 세련됐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집안을 천천히 둘러보는 동안 알 수 있었다. 데니스네 집은 데니스네 가족이었다. 이 집엔 이 가족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가족들이 어떤 기쁜 일을 겪었으며 어떻게 함께 웃고 사는지 구석구석 보였다. 세 딸과 막내 아들은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색깔로 벽을 칠했다. 작은 딸의 방에는 할머니가 쓰던 화장대가 있었다. 가족이 함께 하는 거실과 주방이 한 곳에, 네 자녀의 방은 촘촘하게 붙어 있었다. 데니스와 아내는 춤추는 것을 좋아하는 딸들을 위해 뒷마당에 매트를 깔아 공연장처럼 만들었다.

가족이 꼭 지키는 원칙이 있는지 물어봤다. 다들 특별한 건 없다고 했지만 계속 묻자 엄마는 “원칙이라고 까지 할 건 없지만 매일 저녁 6~7시쯤 되면 가족이 다같이 모여서 커피를 마신다”고 했다. 생일이나 크리스마스처럼 중요한 날엔 꼭 다함께 저녁을 먹는다고 했다. 한국의 20대는 ‘중요한 날’을 친구나 연인과 보낸다. 첫째 딸 샬린(25)과 둘째 딸 알리슨(21), 셋째 딸(18) 메간에게 “아쉽겠다”고 찔러봤다. 다들 눈을 크게 뜨더니 말했다.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오면 되지” 메간은 “특별한 날인데 당연히 가족들과 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 생각이 났다.

아빠 데니스는 “친구들이 다 동네에 살고 있고 아이들 친구들의 부모들과도 다 이웃이고 친하기때문에 이집 저집 할 것 없이 드나들며 지낸다”며 “다 가족”이라고 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 골목이 생각났다. 이곳은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일까.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 ‘동네 친구’ 2명이 들어왔다. 샬린과 알리슨의 친구들이라고 했다. 원래 이렇게 자주 오냐고 했더니 “친구네 집이니까요”라고 했다.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쇼파에 앉아 제집처럼 가족처럼 놀았다.

한국의 많은 평범한 부모와 자식들도 화목하게 지내고 싶지만 세대가 다르면 언어도 문화도 달라진다. 세대갈등은 없을까. 샬린은 “세대차이? 우리 집에선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며 “세대 차이가 아니라 의견차이가 아닐까”라고 말했다. 샬린은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대화를 많이 한다. 대화를 하면서 중심을 잡고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면 해결된다”며 “어렸을때부터 부모님이 나쁜 일에 대해선 왜 나쁜 것인지 차근차근 설명을 해줬고, 늘 이해하면서 성숙하게 됐다”고 말했다. 파트리시오는 “사춘기는 누구에게나 ‘지나가는 순간’”이라며 “잘 지나가도록 지켜보면 된다”고 말했다. 청소년 투표 취재때문에 만났던 여고생 다니엘라가 “내가 힘들다면 할머니도 나를 이해하기 얼마나 힘드시겠냐”고 말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여기 사람들은 다 왜 이럴까. 이런 인터뷰를 했다고 하면 누가 진짜라고 믿어줄까. 한참 반항할 나이, 12살인 막내 아들에게 “엄마 아빠가 잔소리하거나 너를 이해하지 못해서 문을 쾅 닫고 들어가는 일 없냐”고 했더니 아들은 영 이해조차 못하는 표정이었다. 데니스와 가족들은 문닫는 시늉을 하며 나를 놀렸다. 데니스가 말했다. “우리에게도 힘들지 않은 순간이 왜 없었겠어. 매순간 최선을 다해서 즐기는 것이 우리가 행복한 비결이야. 하느님이 언제 행복을 빼앗아 갈지 모르거든. 우린 매순간 감사해.”


■행복을 선택한 사람들

정말 행복할까. 남한의 절반 크기에 인구는 약 481만명. 영화 〈주라기 공원〉을 찍을만큼 잘 보존된 자연. 생태와 평화와 인권이 연관검색어인 나라. 코스타리카는 유럽의 연구소들이 만든 ‘지구행복지수((Happy Plnet Index))’에서 2015년 64점으로 151개국 중 1위에 올랐다. 2013년에 이어 두번 연속이다. 지구행복지수는 국가 소득이나 생산량 등 부의 기준에서 벗어나 얼머나 지속가능한 행복을 느끼며 사느냐를 기준으로 만든지수다. 각 나라의 기대수명과 삶의 만족도, 친환경 부분을 고려해 각나라 국민이 평생동안 얼마나 행복한지를 보여주는 수치다. 한국은 2015년 43.8위로 53위를 기록했다.

숫자가 행복을 말해주지 않지만 그래서 더 궁금했다. 한국은 70~80년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뤘고 외환위기도 단시간에 극복했다. 선진국들만 가입한다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다.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숫자로만 본다면 우리도 행복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아이부터 노인까지 불행하다고 절규하고 있다. 코스타리카도 그렇지 않을까. 정부가 평화인권국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곤 있지만, 코스타리카의 평범한 시민들은 고통받고 있지 않을까. 단단히 의심을 품고 갔지만 코스타리카에서 나는 계속 무너졌다.

엿새동안 거리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지어주는 정도가 아니었다. 오늘 이 동내에 무슨 좋은 일이 있었나 싶었다. 국가와 정부에 바라는 점이 있는지 물어보면 한결같이 “코스타리카가 지금 같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달에 100만원을 버는 아저씨(물가는 한국과 비슷하다)도 백수 아가씨도 10대 청소년도 노인들도 ‘작고 평화로운 나라’ 코스타리카를 자랑스러워했다.

인터뷰할 때 직업을 물어보는 것이 실례가 되지 않았다. 직업엔 귀천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길에서 만난 청소부 중엔 청년들도 많았다. 대통령도 하나의 직업으로 여겼다. 대통령도 경호원 없이 다니고 동네 공원에서 혼자 운동을 한다. 종종 TV에 반팔입은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국회 담장엔 누가 그려놓은지도 모를 그래피티가 벽을 덮고 있었다. 국회인지 일반 건물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국회 옆 공원에서 만난 레게머리 청년 조르예(22)는 “국회가 꼭 집처럼 생겼다. 전혀 특별해보이지 않네”라고 말하자, “그게 이상해? 한국 국회는 어떤데?”라고 물었다. 처음 몇번은 인터뷰할 때 “동안”이라고 인사를 건넸다가 별 반응이 없어서 당황스럽기도 했다. 나이가 많고 나이만큼 보이는 것을 민망해하거나 안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코스타리카 부모들은 자녀가 15살이 되면 진로를 결정하게 한다. 법적인 성인은 18세이지만 15살이 넘으면 책임감 있는 나이로 인정해준다. 공부를 계속하게 할 것인지 직업을 가질 것인지 묻는다. 공부를 하겠다고 하면 학비를 지원하지만 직업을 갖겠다고 하면 일자리를 얻도록 도와준다. 일을 시작하면 부모에게 적은 양이라도 월세를 낸다. 사회인으로 인정하고, 책임도 알려주려는 뜻이다.

직업을 가졌다가 다시 공부를 하고 싶어지면 그때 하면 된다. 코스타리카 대학은 학비가 완전 무료인 국립대 두 곳을 빼곤 경쟁이 치열하지 않고 사립대 학비도 1년에 100만원 정도다. 국방비를 없애고 교육에 투자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의 수능에 해당하는 대학시험점수를 따놓으면 10년간 유효하다. 대학에 들어갔다 나와서 일을 하다 다시 따놓은 점수로 대학에 갈 수 있다. ‘두번째 기회’가 있는 것이다. 대신 학사관리는 엄격하다. 초등학생도 연말 시험에서 70점을 넘지 못하면 유급한다. 공원에서 만났단 한 중학생은 한 학년을 유급중이었지만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저축은 거의 없다. 오늘 번 돈으로 오늘을 산다. 가족과 여행가고 집 꾸미는 것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11월이면 이미 크리스마스 장식품 가게에 물건이 동난다. 하지만 낭비하는 삶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물건은 쉽게 버리지 않고 한번 산 물건은 오래 쓰고 고쳐쓴다. 코스타리카 거리엔 한국의 90년대 차종이 많이 보였다. 한 번 차를 사면 20년씩 타기 때문에 중고차 부품 가게가 거리마다 눈에 띄었다. 집밥을 좋아해 주로 도시락을 싸서 다닌다. 맥도널드는 아침메뉴로 한국식 백반에 해당하는 ‘까사도’ 메뉴를 판다. 코스타리카의 가족중심문화가 패스트푸드점 맥도널드에서 삶은 팥(까사도의 주 메뉴)을 팔게 만들었다.

공중도덕, 노인과 장애인에 대한 존중의식도 뛰어났다. 현지에 만난 교민 김정혜씨(24)는 “만원버스에 할머니가 타려고 하자 운전기사가 일어나 큰 소리로 ‘할머니 타십니다’라고 말하고, 승객들이 다 자리를 비켜준다”고 말했다. “장애인이 타면 버스든 택시든 휠체어를 실어주는데 아무도 그걸 특별하다거나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가난한 것보다 약자를 괴롭히거나 무시하는 걸 더 부끄러워 하는 사람들이다. 그 이야길 듣는데 마침 앰뷸런스가 지나갔고 양방향의 모든 차들이 멈춰섰다. 정혜씨는 “여긴 동물들도 스트레스를 덜 받아서 개가 기본적으로 10년씩 살고 앵무새는 20년 넘게 산다”고 말했다. 가톨릭 인구가 많은 코스타리카에선 미사 시간 성당에 들어온 동물들도 내쫓지 않는다.

어떤 제도, 어떤 조건이 행복을 보장하진 않는다. 코스타리카에선 임산부에 대해 각별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했는데, 임신출산비용은 나라에서 책임지지만 출산·육아휴가는 4개월뿐이었다. 이 곳의 워킹맘들도 가족과 이웃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키운다. 그래도 코스타리카에서 만난 여성들은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개구쟁이 아들(5)과 딸(2)을 키우고 있는 워킹맘 마리아나(26)는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게 쉽지 않지만 그래서 더 가족끼리 단단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마리아나는 “내 아이가 자라서 살 이 나라가 앞으로도 전쟁없이 평화로울 나라라는 사실에 마음에 든다”고 했다.

내가 만난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행복한 이유가, 행복할 이유가 많았다. 국립공원에서 산길을 오를때 날씨가 계속 바뀌어서 우산을 써야할지 말아야할지 불평하고 있는 내 옆에서 한 소녀는 감탄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자연을 짧은 시간에 다 느낄 수 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 갑자기 예정에 없던 마라톤때문에 길이 막혀 돌아가야 했지만 불평하거나 항의하는 사람도 없었다. “마라톤은 건강에 좋은 일이니까. 좋은 일은 축복해줘야지” 라는 게 이유였다.

남미 특유의 낙천성 때문일까. 종교덕분일까. 설마 이 모든게 67년 전 한 지도자가 군대를 없앴기 때문이라고 볼 순 없다. 먼 길을 행복을 찾아 떠난 내게 행운이 가득 찾아와, 우연히 좋은 사람들만을 만나게 해준 것이라고 믿는 것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두 아들을 키우고 있는 실비아(47)는 행복을 찾아왔다는 내게 이런 말을 해줬다. “친구, 행복은 결정하는 거야. 영혼 깊은 곳에서...나는 행복하다고, 행복하고 싶다고 결정하는 거야. 친구가 한국에서 코스타리카까지 온 것도 우연이 아닐거야. 오늘부터 연습해봐.” ‘뿌라 비다’의 나라, 코스타리카에서 나는 행복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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