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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울부짖음: 브뤼노 라투르 인터뷰(LA CIVILTA CATTOLICA)
  • 2024-01-10
  • 376

저자: 안토니오 스파다로1)
번역: 윤성희(영문학 박사, 전문 번역가)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인류학자이자 파리 정치 대학 명예 교수이다.2) 라투르 교수의 작품들은 대략 30개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덕분에 그는 현재 불어권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작가이다.
기후 위기에 관한 작업으로 그는 생태 문제에서 세계적으로 중요한 인사가 되었다. 지난해 주간지 롭스L’Obs는 표지에 그를 소개하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영감을 주는 사상가”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3) 라투르 교수는 파리 제5지구의 중앙에 있는 오데온 근처에 산다. 나는 중요한 이슈들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생겨나는 근거 있는 희망에 관해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에 그는 거의 50년간의 연구와 강의, 저술과 활동 등을 바탕으로 내가 제기한 질문들에 답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삶의 낙조를 함께 바라보는 듯한 체험을 했다.

 

■ 글이나 컨퍼런스 등에서 선생님은 「찬미받으소서Laudato Si’」의 예언자적 성격을 여러 차례 칭송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 문헌이 어떻게 선생님 연구에도 중요하게 되었나요?

 

저는 「찬미받으소서」를 읽자마자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회칙은 제 책 『가이아와 마주하며Face à Gaïa』와 같은 해에 출간되었습니다.4) 그래서 이 회칙을 제 책에 고려하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제 책에서는 제가 “우주론적 변형cosmological mutation”이라고 부르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려고 애썼습니다. 이것은 물질성과 영성, 정치, 그리고 “세상”과 “자연”의 개념이 변화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모든 관계에 생겨난 변형이기도 합니다. 저는 「찬미받으소서」를 읽는 동안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문헌에 새로운 상황의 예언자적이고 종말론적 차원이 얼마나 아름답고 또 완전하게 표현되었는지를 보고 놀랐습니다. 그것은 그 시기 COP21(= 유엔 기후변화 협약)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역사적 선언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들이 관심을 가지게 하려고 애썼으나 다소 절망감을 느끼던 문제들에 대해 그분이 보인 예언자적이고 종말론적인 개방성에 깊이 감명을 받았습니다. 회칙은 온갖 주제를 다루었고, 그로써 매우 중요한 몇 가지 신학 문제와 소통의 문제를 더 잘 이해하게 하는 예상치 못한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지난 3세기 동안 자연에 대한 성찰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통찰을 무시했습니다. 새로운 생태적 상황에 그러한 통찰이 필요했음에도 말입니다. 이런 점이 제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교황님의 문헌은 제 생태주의 친구들, 소위 “자연 과학”의 주창자들을 흥미롭게 했습니다. 그래서 대략 17세기 이후로 불가능해졌던 새로운 대화의 문이 확실하게 열렸습니다.

 

■ 문헌의 어떤 면이 새로운 우주적 상황의 발현과 잘 맞아떨어지나요?

 

엄밀히 말하면 산다는 것이 무엇을 내포하는지를 새롭게 이해한 점이 핵심입니다. 지구의 울부짖음과 가난한 이의 울부짖음을 연결시킴으로써, 교황님은 생태와 불의 사이에 연관성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지구가 흥분되어 있고, 행동할 수 있으며 고통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참된 생태론적 접근은 언제나 사회적 접근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한 접근은 정의의 문제를 환경에 관한 논의에 결부시켜 지구의 부르짖음과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 모두에 귀를 기울이게 해야 합니다.”(찬미받으소서, 49)

 

회칙은 가톨릭 교회 안에서든 밖에서든,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볼 때 이제까지 도덕적 차원으로 다루었던 주제들을 우주적 차원으로 회복하는 데 성공합니다. 저는 현대 신학에서 우주가 완전히 빠져 있는 것에 늘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우주적 차원이 빠져 있었습니다. 갑자기 생태적 위기가 오면서 우주는 다른 모든 이에게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엄청나게 격렬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매우 놀라운 두 번째 혁명을 목격해 왔습니다. 우주적 문제들에 대한 이러한 재평가와 관련해 교황님은 빈곤과 같은 소위 “사회학적 질문들”을 재정립했습니다. 이 둘의 연결은 “공적인 형이상학”에서는 전례가 없습니다. “공적인 형이상학”에서는 지구가 울부짖을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고,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는 빈곤한 이들은 이러한 “지구의 울부짖음”과 아무 연관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충격, 과감한 변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이런 변혁은 우주론, 다시 말하면 우리의 세계관이 변하고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제가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과 연결 짓는 “사물들의 의회(Parliament of Things)”를 열자고 촉구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은 지구의 울부짖음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대변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억압받고 황폐해진 땅도 가장 버림받고 혹사당하는 불쌍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지구는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로마 8,22) 있습니다.”(LS 2)

 

우주론의 재구성은 과학에 대한 흥미를 다시 일으키고, 교회가 3세기 동안 견뎌왔던 옆구리의 가시를 제거합니다. 이 가시는 교회가 자연 과학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해서 생겼던 것이지요. 저에게는 이 점이 지구 과학에 가장 혁신적인 것으로 보이는 부분입니다. 이 새로운 학문 분야가 주는 임팩트는 많은 걸 바꿉니다. 그것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 젖히고, 과학이 더는 “객관적 관점”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관해 말할 수 있게 합니다. “객관적 관점”은 어떤 재료를 다룰 수 있는지를 정의하고, 필요하다면 그것에 영적이고 미학적이고 도덕적 요소들을 추가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갑자기 재료라는 개념 자체가 변했고, 이 변화는 반향을 일으킵니다. 신비하게도 교황님은 우리가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과 지구의 울부짖음이 연관되어 있다는 걸 볼 수 있게 하는 매우 다른 우주론에 마음을 여셨습니다.

 

■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어떻게 지구가 울부짖을 수 있는지를 이해하느라 힘들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것은 효율적인 은유입니다. 그것은 구성 요소나 존재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제2차 과학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정말 괜찮은 은유입니다. 지구를 구성하는 존재들은 각자 고유한 행동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든 생물이 살아가고 있는 지상의 연약한 표면에 의도치 않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수억년에 걸쳐 일어났지만, 우리는 이제 갑자기 그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우리 인간 활동에 대해 잔혹하게 반발합니다. 지구의 긴 역사와 인간 사회의 짧은 역사가 충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구의 반발은 과학사에서 일어난 모든 혁명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이래로 닫혀져 있던 우주론적 체계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이 문헌은 깨우침을 가져다줍니다.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 살고있는 세상에 우리는 잠시 거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세상을 서서히 구성해 왔던 존재들이 서로 의존하는 새로운 환경이 마련되었습니다. 이 문헌은 이런 새로운 환경에 적합하고, 그런 면에서 진정 예언자적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지구가 어머니라는 걸 기억하게 됩니다.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누이이며 어머니인 대지로 찬미받으소서. 대지는 저희를 돌보며 지켜줍니다. 우리가 손상을 입힌 탓에 이 누이가 지금 울부짖고 있습니다.”(찬미받으소서, 1-2) 그리고 뉴에이지 없이, 은유적 용어들에 빠지지 않고 그렇게 합니다.

 

불행히도 지구 과학에서 일어나는 혁명을 이해하는 데 적절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이해해 온 물질세계에서 계속 살아갑니다. 그들은 여전히 오래된 과학 개념 속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은 실망스럽습니다. 사람들은 이해하려 들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시도가 이루어진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 하지만 왜 사람들은 이해하려 하지 않는 걸까요?

 

저도 왜 그러는지 알고 싶습니다. 살아있는 존재들이 자기들이 살고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이들이라고 설명할 때, 그것은 변화를 일으킵니다. 지구, 그리고 제 동료와 제가 “결정적 구역critical zone”5)이라고 부르는 것은 생명의 진화에 특별히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변화는 그런 조건들을 만들어낸 살아있는 존재들 스스로가 가능하게 했습니다. 지구는 뉴에이지나 단순화된 의미에서 단일 유기체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들에 의해 지어지고 생산되고 발명되고 엮어집니다. 지구는 살아있는 존재들이 움직이는 단순한 틀이 아닙니다. 제 위에 있는 하늘과 대기와 그것의 구성, 가스들의 분배 등을 볼 때, 이 모든 것은 살아있는 것들의 행위가 낳은 결과입니다.

 

우주론의 변화는 교황님이 말씀하신 것들 가운데 몇 가지를 다시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새로운 환경 체제와 지구 과학이 우리의 세계 이해에 남긴 충격은 지구 거주자라는 우리의 조건에 영적 현실들이 풍부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길을 열어줍니다. 17세기에 교회는 세상과 동떨어진 채 과학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 시기 과학은 우주를 이해하는 데에는 매우 흥미롭지만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는 데에는 아무런 통찰을 주지 못하는 물질성의 개념을 강요했습니다. 이전 세기들의 물질주의는 슬프게도 사실은 매우 비지구적입니다. 지구에 사는 존재들의 경험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되돌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4억 5천만 년 동안 펼쳐진 역사 속에서 매우 제한적이고 국한된 작은 서클을 구성해 온 유한한 생명체들 가운데 살고 있는 유한한 존재들입니다.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찬미받으소서」를 좋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여전히 물질적 기계적 우주론에 대한 반발 단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분석을 해보면 지구가 그저 배경이라는 걸 마침내 알 수 있습니다. 교황님은 지구가 어머니와 누이 같으며, 우리가 그것과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걸 이해하도록 관점의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당신의 동료들도 이런 식으로 문헌을 이해했습니까?

 

읽고 토론하는 게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찬미받으소서」의 다른 공헌, 곧 가난한 이와의 연결고리 덕분에 우리는 이를 통해 다른 방식으로 따져 보게 됩니다. 불평등이라는 고전적 사회 문제들과 방금 정의한 의미에서의 우주론적 문제를 서로 연결시킨다면 피할 곳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우주론에 관해 이야기할 때, 사회적 문제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지 않았고 어떤 의미에서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우주론적 상황과 연결시킨다면, 우리가 살아있는 존재가 점유하고 있는 통합적으로 정의된 공간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 결과 산업화를 거친 인간들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환경 위험기Anthropocene라는 큰 문제가 떠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 관한 근본적 질문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더는 부차적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문제는 작물 흉년, 공해, 가난한 생활 환경 등과 같은 많은 이슈로 연결됩니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새로운 상황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사회적 이슈를 의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20세기 접근에 따르면 우리는 여전히 시간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늘 ‘다 잘 될거야. 사회적 질문은 매우 중요하지.’ 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우주의 차원으로 이동해 왔습니다. 이 공간은 줄어들어 있고 깨지기 쉽고 계속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움직임들에 전속력으로 반응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훨씬 더 강력한 방식으로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합니다. 이것은 「찬미받으소서」의 한 부분에서 매우 잘 묘사됩니다. 이미 끔찍한 생태 환경에 살고 있는 이들은 가난할 뿐 아니라, 생태적 비극도 겪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부유한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이에게 세상이 망가졌습니다. 하지만 부유한 이들은 도망가 숨을 수단이 있습니다. 카인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근대화를 이루는 데 긴 시간, 대략 3세기가 걸렸다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동안 우리가 지구에 해를 끼쳤다는 걸 이제는 압니다. 끔찍한 상처를 남긴 것입니다.

 

교회는 거의 120년 동안 근대화라는 문제와 씨름해 왔지만, 놀랍게도 이제는 근대화라는 계획 자체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근대화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이제 우리는 모두가 우주론에 관해 불확실성을 느끼는 상황, 근대화 계획이 어디에서나 의문시되는 상황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다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과의 접촉에서 떨어진 채 환경이나 정치 윤리에 관해 추상적으로 설교하고픈 유혹에 빠지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새로운 환경 질서와 환경 과학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지구, 우리의 ‘서식지Habitat’를 구성하는 존재들의 무리에 관심을 기울이라고 강력히 권고합니다. 선생님이 운영하는 워크샵에서 바로 이런 일을 하는 건가요?

 

무엇이 우리를 생존할 수 있게 할까요? 우리의 생계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생계가 어떻게 위협 받고 있나요? 우리는 무엇을 할 준비가 되어 있나요? 왜인가요? 저항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나요? 이것들은 의식과 지향이라는 매우 간단한 질문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질문들을 집단적으로 제기하는 것은, 우리가 풍력 발전소를 지어야 하는지 마는지, 쓰레기 분리 수거를 해야 하는지 마는지를 알아내려고 당장 애쓰지 않아도 진정으로 치료적 효과를 가집니다. 우리 워크샵에서는 우리의 생활 조건들을 함께 묘사해보고 그 내용을 나눕니다. 이것은 공동의 이익이 무엇인지를 전달하기 위한 정치적 선언의 첫 단계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맥락에서 이러한 워크샵들을 진행해 왔습니다. 마을 회관에서, 본당에서, 도시에서, 시골에서… 처음에 참가자들은 완전히 추상적인 것들 덕분에 살아남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세 번째나 네 번째 세션에서는 그것들이 구체적인 요소들이 됩니다. 그것은 옆 집에서 자동차 청소를 해서 물 공급이 오염된 농장일 수 있습니다. 또는 원인을 알지 못한 채 병을 얻은 누군가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음식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긴 조사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매번 우리는 치료적 효과, 우리가 한걸음 앞으로 나갈 수 있게 하는 회심의 효과가 있음을 확인합니다.

 

■ 온갖 차원의 감정에 관한 작업도 있는데요…

 

그렇습니다. 현실 정치와 연관된 열정들은 매우 오래된 열정들입니다. 이런 열정들은 매우 슬프고 매우 편협하고, 풍경이나 생태 시스템과 같이 매우 특이한 것들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생태적 문제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 기초적인 표현 역량을 재활성화하기 위해 예술적 방법을 활용한 많은 작업을 합니다. 오늘날 개인은 너무나 고립되어 시민이 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시민이란 다른 시민을 보고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듣는 능력, 공간을 가로질러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되살리려고 노력합니다. 이들은 절대적으로 기본적인 것들이지만 필수적이진 않습니다. 목적은 이 상황이 얼마나 극적인지를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를 “구현해” 내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제 두 살배기 손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참가자들은 자신이 무얼 할 수 있을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 진정한 영신수련이네요!

 

워크샵 “어디에 내릴까Where to Land”나, 베르나르도회에서 하는 워크샵들은 영적 또는 생태적 해방 훈련입니다. 이것들은 모더니즘과 같은 특정 지배자를 우리 안에서 몰아냅니다. 워크샵들은 생태적 도구입니다. 거기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공간은 시간보다 해방을 더 잘 준비시킵니다.6)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무얼 하고 있습니까? 문제는 ‘육화’의 훈련이라 할 수 있는 이 모든 훈련이 항상 영적 훈련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려운 점이고 비판은 이 지점에서 나옵니다. “종교적” 문제가 아닌 그런 일들을 왜 교황님이 다루고 있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교리 수업에 나오는 아이들이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습지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을 하지 않지요. 습지 문제도 교리 수업에 나오는 아이들 문제와 같이 영적 문제라는 것, 그리고 이것이 조금씩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의 자체에 들어간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듣기 힘듭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육화의 문제입니다!

 

■ 팬데믹 때문에 이렇게 전세계적으로 갇혀있는 상황에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나는 경고를 담은 책 하나를 출간했습니다.7) 의료적 감금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지구 차원의 감금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무한한 공간 속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인간 존재가 강력한 지리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의료적 감금에서 나왔다고 영원히 ‘감금해제’ 될 것이라고 상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평생 갇혀있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우울한 소식이겠지만, 이곳이 당신이 사는 곳이고 이곳이 생명체가 늘 살아온 곳이며, 이곳이 생명체가 영원히 살 곳이라는 걸 깨닫게 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더는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 묵시론적 지평이 됩니다.8) 결정을 위한 시간은 지금입니다. 이후로는 자신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볼 수 있는 다른 공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현재에 이루어지지 않은 모든 애덕의 실천이 미래에 행해질 것처럼 상상할 수 없습니다. 복음이 말하듯이 지금이 중요합니다. 지금이에요. 이것은 매우 단순한 아이디어입니다. 이 아이디어에 따르면 우리에겐 시공간과 우주론을 다시 열어 정의할 만큼 새로워진 지구 과학, 모든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질문들을 새롭게 제기하게 하는 지구과학이 있다는 사실이 뭔가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게 합니다.

 

감금이라는 주제는 다소 부정적입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땅에 속한 것들입니다. 땅에 속한다는 건 제가 널리 이해시키려고 애쓰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땅의 존재들, 유한한 생명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지구는 현대인들을 흥미롭게 하지 않습니다. 신자나 종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일부 사람들이 「찬미받으소서」에 불만스러워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왜 교황이 건강한 생태 시스템과 같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첫째, 그것은 종교적 주제가 아니고, 둘째, 별로 재미도 없는데 말입니다. 적어도 화성으로 탈출하는 것만큼은 재미가 없지 않습니까? 사실 그것에 관심을 갖기 위해서는 이미 변화를 체험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훈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갑자기 사람들이 자기 관점을 바꾸고 이렇게 말하게 하는 겁니다. “아, 내가 있는 곳이 여기구나.” 추상적이고 너무 커 보이는 환경 보존 문제가 갑자기 구체적이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자신이 사는 세상이라는 걸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 “물질적”이기 위해 그렇게 많이 강조를 해야 한다는 게 낯섭니다!

 

근대 이후 우리는 그래야 했습니다! 하지만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비물질화했고 추상적 세계를 떠올렸습니다. 추상적 세계도 과학 네트워크 안에서 유용한 기능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건 지구가 아닙니다. 새로운 생태적 상황과 함께 우리는 지구로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신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게 합니다. 구원사에는 어떤 영향이 있는가? 이러한 기초적 질문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중세도 끝났고 근대도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교회는 도덕이나 정치나 과학 분야 등에 자기 존재감을 확립하려고 애쓰지 않고, 다른 양태의 존재들과 완전히 새롭게 시민다운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을 분명하게 내세울 수 있는 새로운 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시기에는 신학에 초점을 맞출 가치가 있습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가까운 사람들이나 제 동년배들에게 그러한 종교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하는 것보다는 더 어렵다고 느낍니다. 그런 언어들을 편하게 느끼기 위해 제가 무얼 할 수 있을까요? 결국 이 문제가 우주론의 문제인지, 회심하라는 말씀에 순명하는 문제인지 더는 아무도 모릅니다. 회심의 말씀이 스스로 행동한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것은 물과 같습니다. 어디든 가고 어느 틈에나 들어갑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설교는 이해하기 쉬워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당신의 글로 틈을 여셨습니다.

 

■ 선생님은 50년 넘게 이 분야에서 연구를 해 왔습니다. 지나온 길을 되돌려 본다면 선생님이 경험한 것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저 한 가지를 실감했습니다. 진실에는 다양한 양태가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그걸 발견했지만 그걸로 무얼해야 할지 모릅니다. 제 철학적 여정은 50년 동안 이러한 진실의 다양한 양태를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것이었습니다.9)
우리는 과학적 진리가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놀랍게도 정치적 진실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허구에도 깨뜨릴 수 없는 힘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배우고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생태학을 통해 존재의 재생산이라는 깨뜨릴 수 없고 본질적이고 본체적인 현실을 배우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동안 닫혀 있던 가능성을 열어 종교적 진리도 뒷받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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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a Civiltà Cattolica, 4125 (7 Maggio, 2022) LA TERRA GRIDA Intervista a Bruno Latour, Antonio Spadaro; 인터넷 영어판에는 2022년 5월에 실림.

2) www.bruno-latour.fr 를 보라.

3) L’Obs, No. 2993, January 14, 2021를 보라.

4) B. Latour, Face à Gaïa. Huit conférences sur le nouveau régime climatique, Paris, La Découverte, 2015 참조.

5) B. Latour – P. Weibel, Critical Zones. The Science and Politics of Landing on Earth, Cambridge, MA, MIT Press, 2020.

6) A. S. Breitwiller – B. Latour – F. Louzeau, “Adam, où es-tu? Prêcher à l’époque de l’Anthropocène”, in Esprit, July-August 2021, 193-204 참조.

7) B. Latour, Où suis-je? Leçons du confinement à l’usage des terrestres, Paris, La Découverte, 2021 참조.

8) V. Westhelle, Eschatology and Space. The Lost Dimension in Theology Past and Present, London, Palgrave, 2012 참조.

9) B. Latour, Enquête sur les modes d’existence. Une anthropologie des Modernes, Paris, La Découverte, 2012.

 

 

〉〉 원문

https://laciviltacattolica.kr/2209-05/?fbclid=IwAR177CRg2MMvKo6XkA51-g1tTXul1Y_cci9NVcyJzdaS2RfN5PYeroJxsdE_aem_AY1EMRh4NvhYK2juE765RlD4M52eIoH7McGXmRkNRr-t7PXC5MDQc971ntdW42OvR7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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