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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환경] 지구와사람 칼럼 5월호 - '나무로 지은 집'에 머무르다 '지구와사람'의 공간 유재 留齋
  • 2022-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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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지은 집’에 머무르다._ ‘지구와사람’의 공간: 유재留齋
                                      바보의 뇌는 
                                      철학을 어리석은 것으로  
                                      과학을 미신으로 
                                      예술을 규칙으로 바꿔버린다는 것  
                                      조지 버나드 쇼 George Bernard Shaw


가능성의 문을 열어보려고 늘 탐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섣불리 확정하거나 확고함을 전제하지 않고 딱딱하게 굳은 태도가 아니라, 조심스레 하나둘 모여 머리를 맞대고 차근차근 모색해가는 자세. 하나의 일을 함께 도모하고 구체화하는 과정과 방식이 늘 그렇다. 내가 느낀 ‘지구와사람’의 첫인상이다. 무언가를 위해, 누군가를 위해 한쪽을 열어놓은 마음처럼 그곳의 문은 열려 있다. 

‘지구와사람’의 공간, ‘유재’에 가려면 안국역에서 우선 도보를 시작한다. 양쪽으로 키가 큰 나무들이 일렁이며 그늘을 만들기도 하는 길을 따라 걷는다. 산책하는 느린 마음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천천히 걷다 보면 어느새 도착하게 되는 곳. 유재로 향하는 길은 계절마다 다른 색으로 물들어서 걷는 재미를 덤으로 얻을 수도 있다. 그렇게 마주하게 되는 곳은 아담한 한옥이다. 대문에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유재留齋’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 집에 오가고 머무르는 사람들이 심사숙고하여 붙여준 이름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작은 마당이 있고 신발을 신은 채 걸터앉을 수 있는 마루가 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풍기는 집 안의 나무 냄새는 그 자체로 안정감을 주기도 한다. 실내에 들어서면 유리천장으로 파란 하늘이 쏟아져 들어올 듯한 순간도 만나고,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가 듣기 좋은 날도 있다. 또 어떤 날은 마루에 앉아 하얀 구름이 조금씩 이동하는 것을 전시된 그림처럼 오래 바라보게 되는 날도 있다. 나무로 집은 집, ‘유재’. 이곳에 머무르다 보면 엉켰던 마음이 풀리고 어렴풋이 무언가 속으로 스며들고 몇몇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 금세 유쾌해지는 신기한 일도 벌어지곤 한다. 그런데 집의 이름이 왜 유재일까. 그 의미를 자세히 알아보면서 집의 내부로 차츰 더 들어가 봐야겠다. 


‘유재留齋’의 의미를 되새기다. 남겨 돌아가게 하라! 

기교를 다 쓰지 않고 남겨 자연(조화)으로 돌아가게 하고 (留不盡之巧以還造化)
녹봉을 다 쓰지 않고 남겨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留不盡之祿以還朝廷)
재물을 다 쓰지 않고 남겨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留不盡之財以還百姓)
내 복을 다 쓰지 않고 남겨 자손으로 돌아가게 하라 (留不盡之福以還子孫)


‘다 쓰지 않고 남겨 돌아가게 하라’는 강조의 의미가 유난히 두드러진다. 유재는 이처럼 무언가를 남기는 여유와 서로 나눌 수 있는 마음이 미덕으로 자리 잡는 곳이 되기를 바라는 집이다. 그런 마음으로 머무는 사람들은 이 집을 처음부터 유재라고 호명하기 시작했고 이름을 가진 공간은 서서히 불러주는 대로 그 의미에 가까워지려고 하고 있다. 만물을 창조하고 길러내는 대자연의 이치. 이러한 이치로 만들어진 우주 만물. 추사의 가르침은 이 모든 것에 해당되는 이야기이고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전언이 아닐까. 나누고 남겨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둘러보아야 보이고 보여야 나눌 수 있고 남겨둘 것을 제대로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포럼 ‘지구와사람’은 이것과 맥을 같이 해오고 있다. 유재의 실내에 들어서는 순간, 누가 주인이고 손님이랄 것도 없이 삼삼오오 모여 공부를 하고 토론을 하고 세미나를 열고 ‘생명’에 관한 세부적인 주제를 두고 계속 생각하고 고민하고 연구한다. 그런데 한옥이라는 공간은 이미 한국적인, 한국인의 정서를 포함하고 있어서일까. 평소에는 고요하다가도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한바탕 앞마당에서 잔치가 벌어지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곳에서 들리는 소리가 그렇고 점차 흥이 오르는 분위기가 그렇고 어우러지는 모습 자체가 늘 그렇다. 유재에 깃든 추사의 가르침을 내게 적용해보면 ‘기교를 다 쓰지 않고 남겨 자연(조화)으로 돌아가게 하라’는 문장이 양각처럼 도드라져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시를 쓰는 사람. 시인으로 불린다. 그렇다면 시를 쓰는 재주를 가진 시인은 무엇을 나누고 남길 수 있을까. 재능이라고 불리는 그것을 자신에게서만 끝내지 않고 그것을 통해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는 것. 시를 사랑하는 마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일 또한 추사의 가르침과 닿아있지 않을까. 방안에 틀어박힌 채 작품에만 몰두하며 시에만 욕심을 내던 긴 시간도 있었다. 스스로 유배시켜 놓은 듯이 고립되어 지내던 날들. 돌아보면 꾹꾹 눌러 참으면서도 애써 자발적인 소외라고 외로움을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때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는 어떤 가능성으로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 인간인가. 이런 질문에 자문자답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무렵 나를 밖으로 불러준 게 ‘지구와사람’이었고 ‘생명의 詩작’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시모임은 3년이나 계속되었고 시를 통해 사람들 곁에 머물렀다. 서로의 생각을 나눴고 눈빛이 섞였고 그 시간은 ‘유재留齋’에서 진행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시의 씨앗을 심거나 퍼뜨리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생명과 공존을 귀하게 여기는 시대를 맞으려면 우리는 과학자인 동시에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2018년 시작한 시 아카데미는 시인들과 시를 읽고 쓰며 새로운 시대를 위한 빛을 더하고자 합니다. 시는 우리 삶에 켜켜이 쌓인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생명 본연의 모습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길로 여겨집니다. 시의 내면적 언어를 통해 감응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관계의 연속과 일치를 꿰뚫어내는 깨달음의 순간들이 다가옵니다. 저 깊이 어딘가에서 오롯이 나를 길어 올리고 새롭게 세상을 보려는 당신이 바로 생명의 시작의 주인공입니다’. 2018년부터 시작된 생명문화소사이어티 ‘생명의 詩작’의 강좌 소개 글이다. 나는「자연스러 온(溫), 시(詩)야, 이리 온(ON)」(2018),「지구와 사람과 시와 나와-‘나’를 읽다, 듣다, 느끼다, 어루만지다, 함께 쓰다」(2019),「가장 자연스러운 얼굴로 겨를의 미들 (middle, 美들), 시간과 나와 당신의 중심에 시」(2020)라는 제목의 강좌를 통해 시를 사랑하는 마음들을 만났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당신들이 쓴 문장들이 하나하나 다 귀했고 시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밤이 깊도록 우리 앞의 시간을 아쉬워하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 시간에 우리는 ‘나’를 더 들여다볼 수 있었고 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너’를 궁금해하기도 했다. 삶의 속내를 각자의 언어로 털어놓으며 이전보다 조금 더 밀접해지는 시간을 체험하기도 했다. 색종이에 적힌 단어들을 뽑고 그 단어들을 사용해서 시 한 편을 완성하기로 한 날, 색종이를 하나씩 고르며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당신들의 얼굴은 맑고 밝은 아이의 것과 닮아 있었다. 어느 봄에는 각자의 화분에 채송화, 봉선화, 꼬마토마토, 허브의 씨앗을 심고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는데 내 기억에 그날의 유재에는 흙냄새가 참 강렬하고도 기분 좋게 풍겼다. 꽃마토, 잉꼬, 송화, 채희, 최쑥쑥, 캔디, 소피아, 여름이, 세상을 향한 외침, 지동이. 그날 이름을 갖게 된 식물들은 아직도 잘 자라고 있을까. 새싹의 소식을 문자로 보내주던 당신들과 나의 내부에 식물의 성장일기가 매일매일 함께 쓰이는 듯한 싱그러운 날들이었다. 유재라는 공간에서 새롭게 경험한 시간은 또 많은 기억으로 내 안에 자리 잡았다. 시인은 기억에 빚지는 게 많은 사람이다. 또 쓰기 위해 펜을 들면 그곳의 그 기억 속에서 싹이 트듯 시가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문장을 읽고 쓰며 시를 나눴다. 그리고 유재에서 만들어 갈 시간은 앞으로도 무궁무진할 것이다. 한도 끝도 없고 다할 것도 없고 다될 것도 없는 시간. 시간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빨리빨리 서두를 것도 없고 거창한 목적을 위해 높이 오를 것도 없고 빈틈없이 꽉 채울 것도 없이 유재라는 공간에 발을 들여놓으면 우선 여유로운 마음이 부드럽게 펼쳐지기를 바란다. 그곳이 따뜻한 관계의 연속을 위한 공간이 되고, 내면의 ‘나’를 더 가깝게 만나고,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공간이 되기를. 그리고 생동감 있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마음의 여백을 북돋고 지구와 사람을 위한 여지가 더 많아지는 곳이 되면 좋겠다. 다 쓰지 않고 남겨 돌아가게 하는 것. 유재라는 공간에 요일마다 또 어떤 움직임과 어떤 소리와 어떤 내용이 기록되고 있을까. 5월이다. 곧 여름이 올 것이고, 가을 지나 겨울도 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모일 것이고 머무를 것이다. 타인을 거울삼아 발견하기도 할 것이며 배우기도 하면서 햇빛 아래 나무들처럼 삶을 생기롭게 키우며 놓치지 않고 지켜나갈 것이다. 나눌 것이고 남겨둘 수 있는 것은 남겨둘 것이다. 그리고 나무로 지은 집, 유재는 이후로 아득히 먼 훗날, 우리가 머무르던 그 시간을 품은 채 자연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안다. 그리고 씨앗은 또 싹을 틔우고 나무는 자라나고 나무들은 숲을 이룰 것이다. 그것은 소멸이 아니라 또 시작될, 아름다운 순환의 소식이다. 



글 황혜경
시인. 방송작가. 아트컴퍼니「나는 우리」대표. 시집『느낌 氏가 오고 있다』(2013. 문학과지성사),『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2018.문학과지성사).『겨를의 미들』(2022. 문학과지성사), ‘사람’과 ‘사랑’에 대하여 뒤늦게 수많은 발견을 하고 그래서 더 많은 실천을 바라는 사람.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오래된 꿈을 이루고자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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