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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와사람은 다양한 강좌를 열어 생태대를 향한 비전을 많은 분들과 공유해오고 있습니다. 지구법강좌는 지구법(Earth Jurisprudence)을 국내에 소개하고, 현재 인간중심주의의 산업문명이 초래한 폐해들을 다루며 대안을 연구,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2015년부터 사단법인 선과 공동 주최로 연 4회 개최하고 있습니다. 대한변호사협회 지정 변호사 인정 연수 프로그램으로, 주요 대상은 거버넌스 체계의 변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법률가-변호사와 로스쿨생 그리고 학문후속세대 등입니다. 그밖에도 다양한 특강을 수시로 열어 이야기를 듣고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2016 지구법강좌 제4강 "과학기술사회의 생명윤리와 법률가"
  • 2017-03-13
  • 1376




12월 5일 2016 지구법강좌의 마지막 시간은 "과학기술사회의 생명윤리의 변호와 법률가의 역할"을 주제로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박은정 교수가 강의를 준비했다. “밸리(Valley)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 계곡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실리콘밸리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러한 연상이 단적인 예가 되듯이, 기술환경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과학기술에 둘러싸인 변화를 강조하며 강의가 시작되었다. 그 내용을 정리해 본다. 


생명지식체계의 재편성

과학기술의 영역이 확장되고 있다. 물리현상에서 시작하여 식물, 동물의 행동, 인간의 행동, 사회적 행동, 기억, 감정, 의식으로 점점 확대된다. 인간 내면의 합리성이나 자유의지 역시 탐구대상이 되고 있다. 관찰 중심에서 출발하여 인간 정신 내면에 대한 이해로까지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생명담론의 홍수는 생명지식의 체계가 자연과학의 주도 하에 재편성되고 있다는 신호로도 볼 수 있다. 

이제 “생명은 과학이다.” 생명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묻기보다, 생명에 대한 인과적인 설명이 늘어나고 있고, 생명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자연에는 목적이 없다는 말이 통용되듯이, 인간에게도 목적이 없다는 말이 통용되고 있다. 생명은 소중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함부로 개입할 수 없다는 명제에서, 생명에 개입할 수 있는 지식이 증가함에 따라 생명이나 유전자는 소중하기 때문에 개선시켜 완벽하게 하는 방향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식의 논리가 대두되고 있다. 


생물학적 사실이 다른 목적을 위해 동원되고 있다. 예를 들어 뇌사를 보자. 뇌사는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장기적출을 위한 의제이자 사고의 편법으로 이용되고 있다. 생명 이슈에 대한 접근 관점이 존재의 관점에서 소유의 관점으로 전환되고 있다. 생명형량불가의 원칙에서, 경제적 가치를 평가하여 보호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기존에는 개별자로서 판단하고 책임지는 인간관, 즉 1인칭 화법이 주였다. 그러나 외부에서 작용하는 생명에 대한 설명이 늘어날수록 3인칭 화법이 늘고 있다. 나의 존재와 타인의 존재를 다르게 이해하는 것은 분화를 낳는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을 떠올려 보자. “정신은 말짱한데, 몸이 벌레가 되었다. 가족들이 고통스러워 한다. 오빠라고 생각하지 말고, 벌레로 보자고 제안하는 동생, 외부로부터의 관점에 해당한다. 오빠라는 인간으로서의 1인칭적 주체로서 관점은 사라진다.” 인과적 계보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 이러한 변화가 생긴다. 자연과학적 관찰자의 관점에서 시작한 결과다. 


벤자민 리벳의 실험에 의하면, 자유 의지가 부정된다. 이에 의하면, 행위는 자유 의지가 아니라 뇌파의 물리적인 사건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처한 상황은 인과적인 계보에 따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웃이 처한 상황을 관계를 맺으면서 보기보다는 멀리서부터 시작된 인과적인 설명의 대상이 된다. 결국 데이터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된다. 

인과적인 계보가 독특할 경우, 범죄의 위험군으로 보고, 이를 미리 선별함으로써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여기에는 위험형법, 예방의학. 과학 낙관주의가 배경에 자리하고 있다. 위험에 미리 대처하기 위해서는 초기 인과의 시작 단계에 개입할 필요가 있다는 식이 되는 것이다. 개인의 판단이나 책임보다 위험을 인식하게 하는 과학적 시그널 읽기가 중요해진다. 범죄 통제를 위해서는 인과적 통제 모델이 유용할 수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를 인과적 고리로 설명하려고 들면, 개별적인 행위자의 책임, 그에 기초한 제도 역시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생각해 보자. “예배당의 기침은 문제 삼지 않는다. 잡담하는 것은 문제를 삼게 된다. 불가피하게 잡담하게 된다면, 자유 의지의 문제는 아니게 된다.” 책임은 사회를 통제하기 위한 기술적인 차원의 문제가 될 수 있다. 인간은 결정되어진 존재인 동시에 결정하는 존재다. 미결정성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측면이다. 규범이라는 것은 무엇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미결정성이 수반하는 것이다. 로봇윤리학에서는 로봇에게 윤리 프로그램을 장착하자는 논의가 있다. 그러나 로봇에 윤리 모델을 주입시키는 것은 불확실성을 주입하는 것이므로,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법체계에서 포기할 수 없는 책임 원칙

인간은 개별자로서 판단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다. 이를 전제로 의무가 있고, 그 불이행을 처벌하고 비난할 수 있게 된다. 그 책임이 흐릿해지는 것이 현실이고,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계속되고 있다. (여기서 박은정 교수는 새로운 관점을 제기한다.) “인류의 책임, 자연물에 대한 책임 등 책임의 대상을 확대하자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개별적인 인간이 희미해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책임의 도덕적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효과, 제도의 진지성을 훼손시키는 결과가 우려스럽다.”


인공지능이 딥러닝을 통해서 인간의 직업 능력으로 확장되고 있다. 인공지능에서 인공감성을 연구하고 있기도 하다. 인간의 결정을 수행하는 것에서 나아가, 돌봄 등을 통하여 동반자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한 인간의 결함을 보충하고 보수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사고가 나지 않도록 하는 자율주행차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판단의 문제가 있다. 생명 형량을 전제로 하는 양자택일 상황이다.  

로봇에 대한 논의다. 인공지능 탑재한 로봇에게 자연인이나 법인 같은 법인격을 부여하여, 전자인(電子人)으로 삼고, 등록제를 하자는 논의도 있다. 인간 개념의 확대 또는 인간 의제의 확대를 통해, 약한 의미의 책임을 기계 지능에게 부과할 수 있다. 형법은 의사 결정이 없거나 미약한 사람에 대한 제한 책임을 묻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인공지능 로봇을 제한된 의미의 법적 주체로 상정할 수 있다. 제한된 도덕적 프로그램도 가능할 수 있다. 도덕적인 규칙에 복종하는 로봇을 만들 수 있다. 이 경우 로봇을 문책하기 위해서는 책임 개념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되면 법 제도, 형벌 제도의 도덕적인 진지함이 후퇴될 우려가 있다. 이 경우 자연인의 처벌에서도 책임 원칙의 상대화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 더 위험한 요소는 지속적인 발전의 정점이 완전한 수준의 인공지능이라고 한다면(기능폭발), 이는 집단 지성의 산물이 아닐 수 있다. 글로벌브레인, 강한 인공지능의 경우 개별자들의 개별적인 지성을 다 흡수할 수도 있다. 개별자로서의 개인의 이성의 힘이 약화되는 방향이다. 개인의 판단 능력과 책임 능력이 약화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는 결국 법규범, 윤리규범은 개별자가 판단의 주체라는 전제를 바꾸게 되는 결과가 된다. 도덕이 성립될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된다. 


법과 과학의 파트너십

기술을 도구로 활용하면서, 길을 잃지 않고,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삶과 과학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법과 기술의 관계에 대하여 성찰해야 한다. 과학은 꽤 확실한 진실처럼 보인다. 시대 정신과 사회가 불안정할수록 과학에 매달리는 사회심리가 만연하게 된다. DNA분석을 생각해 보라. 오차가 적다. 뇌 영상을 넣은 기사가 사진을 넣지 않은 같은 기사보다 신뢰도가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배심 재판에서 뇌 사진을 본 사람이 유죄 판결을 더 잘 내리게 된다는 연구 결과가 보고되고 있다. 과학에 가까운 생각을 할수록 판단 자체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과학과 판단 사이의 파트너십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갈등 사안은 법에 의해 결정된다. 그 결정의 타당성이 과학에 의해 보증되는 현실이다. 법칙이라는 개념은 과학이 법으로부터 차용해서 썼다. 과학법칙은 법원칙에서 개념을 빌려 쓴 것이다. 이제는 역전되어 법이 과학을 차용한다. 법관의 유죄판결에 요구되는 심증의 정도로 공리처럼 인정되는 것이 ‘합리적 의심을 넘어서는 증명’이다. 이것이 법이 과학을 차용한 대표적인 예가 된다. 인간의 모든 지식은 불확실하다. 실험실에서 나온 지식도 불확실한 것이다.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의도한 것이 반영되고 있다. 가설의 설정, 실험 방법, 결과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과학적 방법을 둘러싼 논쟁이 해소되었다고 해서, 과학적 지식의 진실성이 확정될 수 없다. 과학에서도 시간적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논쟁이 멈추는 경우도 있다.

과학지식이 만들어 내는 불안을 덜어 주는 역할을 법이 할 수 있다. 법적 판단이라는 형식이 과학의 불안을 덜어낼 수 있다. 과학의 진실성 여부가 법에 의해 보증될 수 있다. 법이 과학지식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과학기술을 산출하기도 한다. 법이 사실판단을 위해 필요로 하는 사실은 선재적인 것이 아니라, 법에 호소함으로써 이를 위한 사실이 뒷받침되는 것이다. 

법정으로 들어오는 과학이 늘고, 법정에서 다툼의 대상이 되는 과학도 늘고 있다. 자신이 주장하는 사실의 객관성을 증명하기 위해 과학적 지식을 동원하고 있다. ‘충분히 과학적인가, 진정 과학적인가’를 법관이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있다. 과학자처럼 생각하는 법률가가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법정과 실험실의 차이

법정과 실험실 모두 다 진실 발견과 진실 재현을 위한 공간이다. 진실 산출이나 진실 발견이란 것은 백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제한적인 조건 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조직된 회의주의(organized skepticism), 최소한의 해(解), 상당한 증거 등이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차이를 살펴보자. 법정은 특정 사건의 분쟁 해결을 위한 것이다. 법정은 시간적 제약이 있다. 사회 정의, 책임 등의 틀 아래에서 작용한다. 법정은 책임 추궁을 목적으로 실체를 밝히기 위한 공간으로, 선택의 상황이 반드시 따른다. 선택의 상황에서 입증책임을 누가 지는가의 문제로 답을 만들어 낸다. 

실험실은 보편적인 현실을 설명하는 공간이다. 윤리적, 실천적 제약이 덜하다. 자연적인 제약 자체를 밝힌다. 입증책임으로 판단의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 간에 진실만을 밝혀야 한다. 

법정과 실험실은 무슨 기준을 적용할지에 대한 전제가 다르다. 법은 자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실체적 진실 발견 프로젝트’를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 과학의 협조가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법정과 실험실의 차이가 간과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남는 문제, 법률가의 역할

과학은 가치중립이라는 이원적 사고가 만연하다. 과학과 기술이 이렇게 생활에 깊이 파고든 상황에서 가치중립이라 말하기 어렵다. 그 커튼을 제치면, 적나라한 모습은 인간사의 모습 그대로다. 시간과 돈에 쫓기는 인간의 활동의 결과가 과학이다. 인간 활동으로서의 자연과학 활동 역시 목적 지향적인 활동이다. 사람의 협조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이는 대부분 윤리적인 문제다. 그 지향점은 인간에 봉사한다. 그 점에서 과학은 소중한 것이다. 인간의 생존과 안녕을 위협하는 환경 문제, 인간의 존엄을 위협하는 권위주의적 권력, 집단적인 위험 등이 사실은 연결되어 있는 문제들이다. 

기후변화 문제는 이제 인권문제와 함께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가 되었다. 개별과학에 의해 분산되고 차별화되었던 것이 하나로 종합하고 통합되어 정리될 문제가 되었다. 지금까지는 자연과학 종사자와 규범 과학 종사자가 서로 다른 문화권에 속해 있는 것처럼 대해 왔다. 이제는 이들 모두가 서로 뒤섞이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법률가도 자연과학 지식을 알아야 한다. 법경제학의 경우 경제학자처럼 사고하는 법률가를 요구하듯이 이제는 인지신경과학을 아는 법률가를 요구하고 있다. 경험적인 사실과 규범적인 논의를 연결시키는 관점을 가지고 이 연구에 동참하자. 학제적인 마인드를 가지자. 


인간과 기계가 서로 다가가고 있다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법도그마틱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 다른 학문과의 협업이 필요하다. 생명공학, 나노공학 등과 의학, 윤리, 종교, 언론이 함께 해야 한다. 법률가들이 이들 사이의 조정역할을 해야 한다. 법학이 이를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법은 삶을 가장 포괄적으로 다루는 학문이다. 법은 본질적으로 종합 학문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가장 빠르게 알 수 있는 것이 법제도를 살펴보는 것이다. 사회마다 법제도가 달라진다. 사회마다 ‘사형제가 있는가, 친족개념이나 재산개념은 어떤가’를 생각해 보자. 왜 그런 차이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법제도는 한 사회가 함께 살기 위해 쌓아온 지혜의 보고라 할 수 있다. 모든 관점이 모이는 곳이 법이다. 건전한 사회의 여망을 하는 법률가가 주도권을 갖고 조정역할을 잘해야 한다. 단순한 법해석이 아니라, 법 정책 방향, 법의 근본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한다. 법철학적인 전제를 가져야 그 역할을 잘해 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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