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와사람

검색
생태기행

지구와사람의 생태기행은 도시 속의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과 교류하고 생태적 가치를 알아가는 시간입니다. 건강한 생태문화를 만들어가기 위해 생태기행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지난 강연
‘소나무와 대나무를 찾아 떠나는 남원 생태 답사’ 이야기 (4월 6~7일)
  • 2019-05-22
  • 1943
봄바람이 불던 지난 2019년 4월 6일 지구와사람 회원과 그 가족, 지인을 동반한 스물여섯 명이 1박 2일 동안 남원으로 생태답사를 떠났다. 이 여행에서는 지리산국립공원 뱀사골의 청정한 자연과 함께 숨을 쉬고, 섬진강 자락의 들과 강이 어우러진 마을숲을 거닐며, 지리산 자락의 맛깔스러운 음식을 함께 맛볼 수 있었다. 

공우석 경희대 지리학과 교수가 답사 길라잡이를 도맡은 가운데, 스물여섯 명의 답사 참여자는 남원 왈길마을과 삼산마을을 탐방하며 마을 숲의 형성과정과 소나무와 대나무의 문화적, 자연적 관점의 생태에 대해 공부했다. 최명희 작가의 대하소설 ‘혼불’의 배경지인 혼불문학관, 운봉의 목기장인 박수태 장인, 지리산 뱀사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양재중 셰프의 농장을 방문하는 등 남원의 전통과 문화를 지켜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기회였다.  

혼불문학관과 남원의 봄을 즐기다
남원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들른 곳은 한민족의 삶과 풍속사를 묘사한 최명희 작가의 대하소설 ‘혼불’의 문장이 숨쉬는 혼불문학관이다. 문학관의 한옥과 넓은 잔디밭은 남원의 봄과 어우러져 아름다웠고, 참여자들은 문학관 곳곳에 있는 작가가 남긴 한구절 한구절 문장에 감탄하며, 소설 ‘혼불’이 지니고 있는 의미와 중요성을 다시금 되새겼다. 더불어 성춘향과 이도령의 이야기가 있는 광한루와 오작교도 걷고, 남원의 명물 추어탕을 맛보며 남원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주인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김병종 미술관과 춘향테마파크를 거닐며 잠시 과거와 현대미술의 세계를 오갔다. 활짝 핀 벚꽃길을 걸으며 풋풋한 봄날의 여유도 가질 수 있었다. 




왈길마을의 마을숲
한국은 상대적으로 다른 국가에 비해 식물이 다양성이 높다. 우리 조상들은 나무를 기를 때 나무의 의미를 고려하고 우리나라 기후와 토종에 맞는 종을 신중하게 선택하였다. 목재로 활용성이 높고, 나무껍질은 땔감으로 이용하고, 연한 나무 줄기는 식용으로 대체하는 등 한국인의 나무 활용법은 다양하다. 왈길마을 입구에는 큰 느티나무 한 그루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심은 나무는 느티나무, 팽나무로 대부분의 국가에서 느티나무는 멸종되고, 한국에서 유일하게 많이 서식하는 나무다. 




왈길마을의 느티나무


7명이 모여야 안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시골길은 고불고불하다. 하천을 따라 길을 만들어 그렇기도 하지만, 기본 목적은 외부 침략을 막기 위한 데에 그 이유가 있다. 서구가 기본적으로 시야가 트이고, 경치가 좋은 언덕 위에 건물을 짓고 외부의 침입을 먼저 확인하고 공격했다면, 우리 조상들은 길을 고불하게 만들고 마을 앞에 마을숲을 조성해 외부로부터 마을의 위치를 숨겼다. 이는 공격와 침입을 우선하지 않는 우리 민족의 성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들은 외부인의 접근을 어떻게 알아차렸을까? 메신저 역할은 까치가 했다. 까치는 공격적이고 영토욕이 강해 외부인이 오면 경고하며 우는데, 동네 입구에서 까치가 울어대면 이를 통하여 외부인이 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낮에 오는 외부인은 주로 마을에 연고가 있는 손님이나 엿과 동백기름을 가져오는 방물장수 등 반가운 손님이 오는 것을 알려준다 하여 까치는 한국에서 길조로 여겨진다.
마을숲은 방풍의 효과도 있다. 나무 높이의 20배 정도되는 거리까지 바람을 막아준다. 또한 울창한 마을 숲은 비보효과가 있다고 여겨진다. 마을의 기운과 재물이 빠져나가지 않게 해 주는 것도 마을 숲을 조성하는 중요한 이유다. 기독교가 한국에 정착하기 이전에는 마을 숲에 서낭당을 만들어 소원을 빌었다. 마을 숲은 이렇게 다양한 기능을 하는 우리 조상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왈길마을 마을숲



삼산마을과 소나무 이야기
마을 주변에 있는 소나무는 우리 조상들이 숲을 보는 관점을 보여준다. 소나무는 한국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삼국시대부터 소나무의 가치는 중요하게 인식되었고, 다른 나무들과 다르게 취급되었다. 금송정책으로 소나무를 베는 것을 나라에서 엄벌하였고, 국민들은 소나무를 베지 못하니 다른 나무들을 잡목, 잡풀이라 부르며 베어 땔감 및 목재로 사용했다. 이같이 소나무는 보호받으며 번식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을 짓거나 부모님의 관을 만들 때는 처벌을 받을 각오를 하고 소나무를 이용했다. 곧게 솟은 소나무가 많지 않고, 구불구불한 소나무가 많은 이유다. 곧은 나무는 잘려져 쓰이고, 구불구불한 나무들은 남아서 씨를 퍼뜨리게 되니 우리 주위에 관상용으로 멋진 소나무들이 많아졌다. 

소나무는 햇빛을 매우 좋아하는 양수이며, 생태계적으로 선구자 역할을 한 나무다. 화산 폭발 후 빈 땅이 생겨 암석이 모래를 거쳐 흙이 된 후에 이끼 및 양치류가 우선 정착했다. 이후 1년생 초본류, 다년생 여러해살이풀, 관목이 정착하고 목본류의 큰키나무 교목들이 자라게 되는데, 그때 들어오는 대표 선구자 역할을 한 나무가 소나무다. 소나무는 땅이 척박해도, 기름지지 않아도, 바람이 부는 곳에서도, 토양에 수분이 많은 곳에서도 잘 자란다. 목재로 활용하는 것 이외에도 잎과 나무 껍질 등을 모아 땔감으로 사용했기에 소나무는 마을 주변에 많이 남아 있다. 






소나무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아픔도 서려 있다. 기름성분인 소나무 송진은 연료로 활용되기에 일본은 소나무가 많은 마을에 할당을 주어 송진을 공수하도록 했다. 소나무 아래쪽에 V자로 상처를 내어 송진을 받아 정제하여 항공연료로 사용했고 많은 소나무들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답사 지역에서도 상처 입은 소나무 아래쪽을 시멘트로 메꾸어 놓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나무에 대한 기록은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발견된다. 평양 근처 진파리에서 발견된 고구려 6세기경 고분벽화에 소나무가 천연색으로 그려져 있다. 고구려 지배층의 묘에 그려진 소나무는 사후 세계에서도 늘 푸른 소나무처럼 살기를 바라는 소망이 엿보인다. 백제는 소나무를 이용한 목재 문화를 통해 융성하였고, 신라시대 솔거가 황룡사 벽에 그린 소나무 그림이 진짜 같아 새들이 날아와 부딪혔다는 이야기가 삼국사기에 나온다. 이탈리아 제노아 미술관에서 발견된 고구려 불화인 수월관음도에도 소나무가 그려져 있으며, 조선시대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소나무가 자주 등장한다.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는 제주도로 귀향 간 추사가 아무도 찾지 않는 귀향 살이 동안 찾아온 제자에게 선물한 그림으로 ‘한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가 푸르름을 잃지 않음을 알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아 자신을 찾아온 제자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이처럼 소나무는 한국의 문화뿐 아니라 정신 세계와도 관련이 깊다. 

소나무는 우리와 호흡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나무로, 한국인은 소나무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의탁했다. 춘궁기 보릿고개 시절 먹을 것이 없을 때 소나무 속 껍질로 죽을 끓여 먹었고, 송화가루로 떡과 과자를 만들었으며, 소나무 아래 송이버섯도 먹거리가 되었다. 여름에는 태풍과 폭우를 피할 수 있는 곳이 되어주었고, 겨울에는 잎과 나무껍질로 땔감을 주었다. 그러나 현재 소나무는 한국에는 흔하지만 전 세계적으로는 멸종해 가고 있는 희귀종 나무다.  

서어나무 숲
소나무가 섬세한 느낌이라면 서어나무는 강인함을 풍긴다. 200년 전, 남원 행정마을의 마을숲으로 만들어진 서어나무 숲은 마을의 안녕을 위한 비보림의 역할을 하는 숲으로, 제1회 아름다운 숲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서어나무는 나무의 줄기에서부터 튼튼함이 느껴진다. 약 100여 그루의 서어나무가 모인 숲이지만 우리가 찾아간 때에는 아직 잎이 나지 않아 숲의 울창함을 느낄 수는 없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을 촬영하기도 한 이 곳은 아직도 춘향이 타던 그네가 있다. 우리는 그네도 타고, 서어나무 숲을 거닐기도 하고,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서 쉬며 숲을 만끽했다. 






위 세 사진 모두 서어나무 숲

운봉목기의 장인, 박수태 장인
운봉목기의 맥을 이어온 박수태 장인을 찾아가 우리 목기의 의미와 가치, 목기 제작 과정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었다. 박수태 장인은 목기를 만들려는 젊은 세대가 없어 기술을 전수할 수 없음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또한 최근에는 목기를 만들고 남은 나무 밑둥을 새집으로 만들어 생태계를 돕고자 하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었다. 이날 박수태 장인은 만들어 놓은 나무 새집을 서울의 자연 속에 설치할 수 있도록 기증했다.





지리산 바람골 농장에서의 식사
남원을 떠나기 전, 지리산 칠상사 앞의 바람골 마을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양재중 농부가 손수 차린 10여 종의 봄나물 점심을 먹으며,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 얼마나 위대하고 풍요로운지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양재중 셰프는 전직 일식 셰프이자 현재 중앙대에서 강의하며 부모님과 직접 밭과 농장을 일구고 있다. 그의 농장을 직접 보며, 농부의 피땀어린 노력과 우리 먹거리를 지키고자 하는 농부의 마음에 찬사를 보냈다. 




나물밥상을 맛본 후에는 한국의 발효음식과 약선음식 전문가인 고은정 명인의 작업실에서 차를 마셨다. 양재중 셰프가 만든 어란과 곶감, 강정을 곁들여 먹으며 한국전통음식과 그 문화의 계승을 위해 노력하는 지리산 자락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차담 후 비가 내리는 실상사를 둘러보며 봄날의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함께 느꼈다.  이번 답사는 2천년 도시 남원을 걸으며 과거의 마을과 숲과 역사를 느끼고, 지리산이 품은 자연과 사람을 보며 미래의 천년을 위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도시와 마을, 그리고 숲과 생태를 어떻게 가꾸어 나가야 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 의미 있는 답사였다. 또 우리 스스로 우리가 살고 있는 생태 환경을 보존할 때,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우리 곁에 살아 숨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첨부파일